매일신문

[내가 읽은 책]나를 키우는 말/이해인/시인생각/2013년

갈림길에서

갈림길에서 멈추었다. 산허리를 휘감는 가을바람에 나뭇잎이 흩날린다. 어디로 가야하나? 두리번두리번 표지판을 찾았다. 소나무 앞에서 나를 보고 있던 표지판과의 대화로 답을 얻었다. 파삭파삭 마른 잎 밟히는 소리에 생각이 열린다. 내 인생길의 길잡이는 무엇이었나? 문득, 돌이켜 보았다.

스무 살, 돌도 씹어 먹을 것 같은 그 나이에 나는 이빨 다 빠진 사람처럼 우물우물 희망을 못 찾고 체념이라는 옷을 입고 살았다. 가을 깊은 어느 날, 발길 닿는 대로 들어간 서점에서 '민들레의 영토'를 만났다. 술술 읽히는 시어, 진실로 위로하는 시들에 사로잡혔다. 표현 기교가 뛰어난 어떤 글보다 시인의 단순하고 순수한 시들에 감동 받았다. 그리고 나는 희망의 옷을 입었다. 예방접종하듯 다시, 시인의 책을 읽었다

최지혜 작
최지혜 작 '낙조'

이해인은 수녀이며 시인이다. 1964년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회에 입회해 1976년에 종신서원 하였다. 1970년 '소년'지에 동시 '하늘은', '아침' 등이 추천 완료되어 등단하였다. 19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 와 '내 혼에 불을 놓아''시간의 얼굴'등 시집들 외에 산문집 '꽃삽' 등과 옮긴 책으로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마더 테레사의 아름다운 선물' 등이 있다. 시인은 30여 년 동안 따뜻한 서정의 작품들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나를 키우는 말' 은 시인이 그동안 발표한 시들 중 60편을 골라 실었다. 시집의 첫 장에 "나에게 있어 시는 삶에 대한 감사와 그리움을 기도로 피워낸 꽃이 아닐까 생각해 보곤 합니다."라고 자신의 작품세계를 말하고 있다.

내가 돌보지 못해/묘비처럼 잊혀진/너의 얼굴. /미안하다 악수 나눌 때/나는 떳떳하고/햇살은 눈부시다//슬픔에 수척해진/숱한 기억들을 지워 보내며/내일을 향해 그네 뛰는/ 오늘의 행복//문을 열어라//나는 너를 위해/한 점 바람에도/흔들리는 풀잎//새 옷을 차려입고/떠날 채비를 하는/나의 오늘이여//착한 누이의 사랑으로 너를 보듬으면/올올이 쏟아지는 빛의 향기//어김없는 약속의/내일로 가라//

-p28 '오늘의 얼굴' 전문

운명론자처럼 주어진 대로 흘러갔던 어제를 지우니, 내일을 향해 뛰는 오늘은, 행복이었다.

우산도 받지 않은/쓸쓸한 사랑이/문밖에 울고 있다//누구의 설움이 비 되어 오나/피해도 젖어오는/무수한 빗방울//땅 위에 떨어지는 /구름의 선물로 죄를 씻고 싶은/비 오는 날은 젖은 사랑//수많은 나의 너와/젖은 손 악수하며/ 이 세상 큰 거리를/한없이 쏘다니리//우산을 펴주고 싶어/누구에게나/우산이 되리/모두를 위해//

-p31 '우산이 되어'전문

이토록 진실하고 따뜻한 위로를 받은 적 있었던가? 나도 누군가에게 우산을 펴 주는 사람이 되리라. 시인의 시는 나를 다시 태어나게 했다.

가을이 깊다. 책들이 좋아하는 계절이다. 사람들이 많이 찾아 책들이 신났다. 그중에 눈에 띄는 책을 읽어보자! 당신이 찾는 길잡이일지 모르니.

최지혜 학이사독서아카데미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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