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5일 대구지법 제11형사부는 흉기로 아내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83세 노인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아내의 목숨을 빼앗은 범죄에 일반적인 양형 기준이 적용되지 않은 까닭은 해당 사건이 '간병살인'이기 때문이다. 간병살인은 오랜 기간 환자의 병 간호를 해오던 간병인이 환자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을 말한다.
지난해 일본에서 출간된 동명의 한글판 책 제목에는 '벼랑 끝에 몰린 가족의 고백'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책은 일본 사회에 충격을 던진 재택 간병을 둘러싼 비극적 사건에 대해 마이니치신문이 심층 취재한 결과물을 담고 있다. 50년을 함께 산 치매 아내를 살해한 남편, 44년간 돌보던 선천성 뇌성마비 아들을 살해한 어머니, 중증 질환으로 오랜 세월 병상에 누워 있던 어머니와 동반자살을 시도한 아들의 이야기 등이 담겨 있다. 한순간에 사랑하는 가족의 목숨을 앗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들과 곁에서 지켜본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간병 생활의 처절한 현실과 암담한 한계를 들려준다.
앞서 재판 결과를 다시 한 번 보자. 판결문에 따르면 A(83) 씨는 지난 8월 2일 오후 1시쯤 대구 한 대학병원 입원실에서 흉기로 아내(78)를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됐다. 올해 1월부터 급격히 쇠약해진 아내는 호흡부전, 의식 저하, 세균 감염 등으로 7월부터 대학병원 중환자실(1인실) 신세를 졌다. 둘째 아들과 교대로 아내를 간호하던 A씨는 사건 당일 기저귀를 갈아주려고 바지를 내리자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있고, 욕창이 심해 살이 썩어가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재판부는 "범행 동기와 경위에 참작할 사정이 있는 점, 유족인 자녀들이 처벌을 원치 않은 점, 피고인이 고령으로 건강이 좋지 않고 경찰공무원으로 28년간 성실하게 근무했던 점을 종합했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재판부는 이런 점을 감안해 양형 기준의 권고형량 범위(징역 7~12년)을 벗어나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주변의 평범한 이웃들, 평생 범죄와는 무관한 삶을 살아왔을 이웃들, 오랜 세월 헌신적으로 가족을 돌보던 이웃들이 어쩌다 '살인범'이 됐을까. 서울신문 탐사기획부는 2018년 9월 8회에 걸쳐 연재한 내용과 미처 다 싣지 못한 이야기를 담아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을 펴냈다. 책 속의 한 대목은 이렇다. "가족을 간호하는 건 대표적인 '그림자 노동'이다. 그림자처럼 돌아보면 허무하게 사라진다. 오랜 시간 아픈 가족을 돌보며 환자 못지않은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받지만 노동의 대가 따윈 없다. 하루하루 의료비 부담은 쌓여가지만 있던 직장도 그만둬야 할 판이니 감당할 능력은 점점 줄어든다. 경제적 부담은 가족 구성원의 삶을 조여 오고 종종 극단적 선택까지 부추긴다."
우리나라는 간병 부담을 덜어주고자 2015년부터 '간호·간병통합서비스'를 도입했다. 보호자나 간병인이 계속 환자 옆에 상주하지 않아도 돼 '보호자 없는 병동'으로도 불린다. 정부는 오는 2022년까지 이런 병상을 10만 개까지 확대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지만, 시행 5년째인 현재 4만2천여 개에 불과하다. 올해 6월 기준 간호·간병통합서비스 대상 지정 의료기관은 1천588곳이지만 530곳만 시행하고 있다.
국가에 모든 것을 떠넘길 수는 없다. 그러나 끝이 보이지 않는 가족 간병, 그 그림자 노동에 지쳐 극단을 강요받는 상황만큼은 국가가 막아야 한다. 간병살인은 한 사람의 생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최후의 방법을 택한 당사자의 타살적 자살이며, 곁에서 지켜본 나머지 가족들에 대한 심리적·정서적 타살이기도 하다.
김수용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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