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교회와 반야월교회, 범어교회, 서문교회 등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민족운동에도 기여한 대구 교회 4곳이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지정 '한국기독교 역사사적지' 지정을 앞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역사위원회가 역사사적지 후보로 제출한 대구 교회 4곳을 지난달 한국기독교 역사사적지로 지정토록 승인했다고 18일 밝혔다. 지정서 수여 시기는 이르면 올 연말에서 내년 1월 전후가 될 것으로 총회는 보고 있다.
한국기독교 역사사적지란 총회 역사위원회가 건립 100년이 넘고 국내 민족사에 미친 영향이 큰 국내 교회를 중심으로 선교사적, 교회성장사적, 교단사적, 민족사적, 지역교회사적 의의를 되새기고자 사적지로 지정하는 사업이다.
대구의 사적지 지정 대상은 사월교회(1898), 반야월교회(1905), 범어교회(1906), 대구서문교회(1912) 등 4곳이다. 대구 최초의 제일교회(1893, 당시 대구읍교회)는 통합교단 측이라 선정하지 못했다.
네 교회는 모두 초창기 대구지역 선교사였던 제임스 아담스(한국명 안의와) 선교사가 1897년부터 1921년에 걸쳐 설립한 지역 교회 30여 곳에 속한다. 아담스 선교사는 제일교회를 비롯한 대구 최초 교회와 근대적 교육기관(계성학교·신명학교), 병원 등을 설립해 한국 근대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사월교회는 1898년 지역민이 먼저 복음을 받아 태동한 뒤 1901년 전후 아담스 선교사를 통해 교회 체계를 갖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 김기원 목사는 1919년 3월 9일 경주제일교회(노동교회) 박영조 목사와 장로교회 윤기효, 박문홍 등과 3·1운동 거사를 준비했고 청년들을 참여시키는 데 앞장섰다. 초창기 설립한 교회로 지역 내 큰 영향력을 미쳤고 역사관을 건립해 교회와 지역 역사 정립에 앞장서고 있다.

반야월교회는 1905년 4월 아담스 선교사 전도로 '신기교회'로 문을 열었다가 교회가 성장하면서 '동호교회', '반야월교회'로 잇따라 개칭했다. 1908년 근대식 학교인 계남학교를 열어 지역 자녀 교육에 앞장섰고 1935년까지 지역 유일 학교로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마찬가지로 3·1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당시 영수 송원재가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맡은 사실이 드러나 옥살이를 했다.

범어교회 역시 1903년 사월교회로부터 복음을 받은 이들이 기도모임을 하고, 1906년 아담스 선교사를 통해 교회 체계를 확립했다. 이 교회 첫 사역자인 김기원은 대구경북 최초의 조사, 장로이자 목사였다. 제17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한 염봉남 목사도 이곳 조사로 사역했다. 일제강점기 사경회를 열고 꾸준히 신앙을 지도해 어려움을 극복했으며 1800년대 영어성경본, 1915년 고어 묵시록 주석 등을 사료를 소장해 역사적 가치가 높다.
대구서문교회는 1912년 대구읍교회(현 제일교회) 신자가 넘치자 주변 성도를 모아 기도처를 마련하면서 설립했다. 1919년 대구 3·1운동을 주도한 정재순 목사 등 지도자 다수가 이곳 소속 교인이었다. 계성학교 교사이던 서문교회 김영서 장로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학생 참여를 독려해 대구 운동이 학생운동 성격을 띠게 했고, 운동을 주도한 인물 다수가 일제로부터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해당 교회는 국내 장로교회사에서도 역대 세 명의 총회장(제17회 염봉남, 제38회 명신홍, 제73회 이성헌)을 배출해 큰 위치를 차지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는 이번 역사사적지 지정이 교단 내에 그치지 않고 국내 사회에서도 큰 울림을 줄 것으로 보고 있다. 앞서 타 지역에서 선정된 역사사적지 경우 문화재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지방자치단체가 시설 및 사료의 관리, 개선 등을 지원한 바 있다.
박창식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역사위원회 위원장은 "이번 네 곳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역사적 가치가 높은 교회를 속속 발굴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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