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관광공사는 10월에 걷기 좋은 길로 유교문화길 제2코스인 '하회마을길'을 선정했다. 2010년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한 안동 하회마을은 조선시대 고택의 향기가 가장 잘 남아 있는 곳이다.
하회마을은 풍산(豊山) 류씨 동족 마을로 마을 앞에는 넓은 들판인 풍산들이 펼쳐져 있다. 민속적 전통과 건축물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낙동강 줄기가 마을을 싸고돌면서 'S'자형을 이루고 있어서 '물동이동', 한자로는 '하회'(河回)로 칭해진다.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인문지리서 '택리지'를 저술한 이중환은 '복거총론'에서 "무릇 시냇가에 살 때는 반드시 고개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 좋다. 그러한 다음에야 평시나 난시(亂時)나 모두 오랫동안 살기에 알맞다. 시냇가에 살 만한 곳으로는 영남 예안의 도산과 안동의 하회를 첫째로 삼는다"고 한 다음 "하회는 하나의 평평한 언덕이 물웅덩이 남쪽에서 서북쪽으로 향하여 있는데 서애(西厓)의 옛 고택이 있다. 웅덩이 물이 휘돌아 출렁이며 마을 앞에 모여들어 깊어진다"고 하회마을이 살기에 최적의 곳임을 소개하고 있다.
하회마을을 대표하는 인물은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서 전시 정부를 이끌었던 서애 류성룡(柳成龍)이다. 1542년 의성 사촌마을의 외가에서 태어난 류성룡은 본가가 있는 하회로 옮겨왔다.
충효당(忠孝堂)은 그의 종택으로 현판은 조선 후기 전서(篆書)의 대가인 허목의 글씨이다. 충효당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영모각(永慕閣)은 1966년 류성룡과 관련된 유물을 보관하기 위해 세운 전시관이다. 내부에는 '징비록'(懲毖錄)을 비롯하여 류성룡 종손가 문적, 류성룡 종손가 유물, 필첩, 영의정 임명 교지(敎旨), 도체찰사 교서(敎書) 등이 보관되어 있다.
양진당(養眞堂)은 아버지 류중영과 형님인 겸암 류운룡의 종택으로 사랑채 정면에는 한호의 '입암고택'(立巖古宅)이라는 글씨가 걸려 있다. 양진당이라는 당호는 류운룡의 6대손 류영의 호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외에도 하회마을을 구성하는 하동고택, 북촌댁, 남촌댁 등은 조선시대 양반 가옥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으며 삼신당(三神堂)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은 마을길은 흙담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징비록'은 1598년 11월 류성룡이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 쓰기 시작했다. 1599년 2월 귀향 이후 형 류운룡과 뱃놀이를 하는 등 오랜만에 여유로운 생활을 하면서 집필했다. 류성룡이 노후에 학문을 닦기 위해 부용대 아래에 세웠던 정자, 옥연정사(玉淵精舍)는 '징비록'을 구상하고 집필하는 중심 공간이 되었다.
제목인 '징비'는 '시경'(詩經) 소비편(小毖篇)에 나오는 문장인 '여기징 이비후환'(予其懲 而毖後患·나는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조심한다)이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류성룡은 스스로 쓴 서문의 첫머리에서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진왜란이 발생한 후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그중에서 임진왜란 전의 일을 가끔 기록한 것은 그 전란의 발단을 규명하기 위해서이다"라고 저술 목적을 밝히고 있다.
'징비록'은 전쟁의 경위와 전황에 대한 충실한 묘사에 그치지 않고 조선과 일본, 명나라 사이에서 급박하게 펼쳐지는 외교전을 비롯해 전란으로 극도로 피폐해진 일반 백성들의 생활상, 이순신, 신립, 원균, 이원익, 곽재우 등 전란 당시에 활약했던 주요 인물들의 공적과 평가까지 포함하고 있어 자료로서의 매력을 더하게 한다.
이러한 자료적 가치를 인정받아 '징비록'은 국보 제132호로도 지정되어 있다. 오늘 국무총리가 일왕의 즉위식에 참석한다. 한일관계에 대한 논의들도 오갈 것으로 보인다. '징비록'에서 제시했던 내부의 철저한 반성과 일본에 대한 냉철하고 정확한 인식은 시대를 초월하여 여전히 의미 있게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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