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은 결혼하는 사람들에겐 축복의 계절이지만 직장인들에게는 '잔인한 계절'이다. 하루가 멀다하고 배달되는 청첩장은 마냥 반갑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축복해야 마땅한 일이지만 한 주에 2, 3개씩 결혼식이 몰리다 보면 축의금 부담에 지갑은 어느새 홀쭉해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돌잔치나 지인이 상(喪)이라도 당하면 경조사비 부담은 더 무거워진다. 그렇다고 2만, 3만원을 봉투에 넣을 수도 없다. 안 할 수도 없고 얼마를 해야 할 지도 고민인 경조사비. 어느 정도의 경조사비가 가장 적절한 것일까?
◆천태만상한 경조사비▷받은 만큼돌려준다=김정순(65·대구 달서구 상인동) 씨는 청첩장이나 부고를 받으면 두 아들의 결혼식 축의금 명부와 부의금 장부를 펼쳐본다. 결혼식에 왔던 사람의 경조사에는 아무리 바빠도 반드시 참석하고, 받은 돈 이상 부조금을 낸다. 김 씨는 "그게 최소한의 예의"라고 말했다. 김 씨는 요즘 한 달에 두세 번 이상 꾸준히 경조사에 가는데 매달 적게는 20만원 많게는 50만원이 들어갈 때도 있다. 김 씨는 "부담될 때도 있지만 남은 막내딸 결혼식 때 어차피 다 받을 거니까 괜찮다"고 했다. 회사원 김모(31)씨는 한 달 평균 15만원가량을 축의금으로 지출한다. 임 씨가 "보통 5만원, 10만원 하는데 봉투 두께를 결정하는 기준은 철저한 '상대주의'에 기초한다"며 "얼마나 친밀한 정도에 따라 금액을 결정한다"고 말했다.
▷인간관계 유지 위해 부조=학교 교사인 이미희(가명·34)씨는 학교 상조회비로 매달 2만원씩 내는 것 외에도 개인적으로 평균 월 10만∼20만원 정도의 경조사비를 지출한다. 이씨의 지출 기준은 친소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개인적으로 친하거나 직접 참석하는 경우에는 5만원, 아주 끈끈한 사이일 땐 10만원을 낸다. 물론 가족이나 친지의 경조사가 있을 때는 훌쩍 뛴다. 이 씨는 "경조사비를 낼 때마다 버거운 게 사실"이라면서도 "사회생활을 원만하게 하고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회사 간부인 심모(57) 씨의 SNS에는 끊임없이 청첩장과 부고가 올라온다. 심 씨는 "경조사 소식을 듣고 안면몰수하지 않는 게 인지상정"이라며 "나보다 윗사람이면 인사치레에서, 아랫사람이면 돌본다는 의미에서 얼굴을 비추고 부조금을 보낸다"고 말했다.
5060세대들은 경조사비는 사회생활 유지의 필요충분 조건이라고 했다. 초등학교 교장으로 은퇴한 김모(65) 씨는 동호회만 10여 개다. 김 씨는 "이따금 모임에 잘 나오다가 소식이 뚝 끊기는 사람이 있는데, 십중팔구 경조사비 때문"이라며 "경조사를 알고도 두세 번 부조금을 못 내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빠진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5060세대들이 각종 모임에 참여해 경조사비를 챙기며 인적 네트워크를 넓히는 것은 또 다른 경제적 행위"라며 "이렇게 쌓은 끈끈한 인맥이 자신의 경제적 기반이 돼 이익으로 돌아온다고 믿기 때문에 경조사비를 아까워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부조한 만큼 돌려받아야.=3년 전 결혼식을 올린 이승수(가명·35)씨는 결혼식을 전후로 자연스럽게 인간관계가 정리됐다. 이 씨는 "청첩장을 줄 대상자를 고를 때 1차로 사람을 거르게 된다"며 "결혼식 후 참석 유무와 축의금 액수에 따라 다시 걸러낸다"고 했다. 이 씨는 "물론 축의금 액수가 사람을 걸러내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중요하다. 내가 10만원 냈는데 5만원 받으면 기분이 나쁘다"고 솔직하게 털어놨다. 이 씨는 끝으로 "내가 낸 만큼 돌려받지 못하면 손해라는 느낌이 든다. 잊으려 해도 그 사람 얼굴을 보면 액수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고 말했다.
11월 결혼할 박서연(가명·32) 씨는 직장생활을 오래 하지 않아 사회에서 만난 친구들이 거의 없다. 그래서 본인 결혼식에 하객수가 적을까 봐 경조사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꼭 참석하는 편이다. 박 씨는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들 결혼식도 참석하며 꾸준히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면서 "내 결혼식 때 돌려받을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
지난 5월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린 전미정(가명·33) 씨는 밥값보다 축의금을 적게 받아 속상했다. 전 씨는 "밥값이 7만원 넘었는데 5만원 내고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식사하는 직장 동료 때문에 화가 났다"며 "저 역시 5만원을 냈지만 혼자 갔기 때문에 손해 봤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며 얼굴을 붉혔다
◆보통 5만원·친하면 10만원
최근 전 직장에서 함께 근무했던 지인의 결혼식에 간 강모(34) 씨는 5만원의 축의금을 봉투에 담았다. 몇년 전 자신이 결혼했을 때 5만원의 축의금을 받은 기억이 나서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주고받는 대화를 듣곤 5만원을 더 봉투에 넣었다. 하객을 위해 준비한 식사비용이 4만5천원이라는 얘기를 들은 것. 심지어 강 씨는 네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간 터라 이런저런 고민을 할 여지가 없었다. 강 씨는"하마터면 인간관계에 있어 낙인이 찍힐 뻔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경조사비 특별한 관계외에는 보통은 5만원, 친하면 10만원을 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5월 잡코리아가 직장인 6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할 결과 직장 동료의 결혼식 축의금은 5만원이면 적정하다는 의견이 63.1%로 가장 높았다.
회사원 김동수(32) 씨는 "동료들 결혼식 축의금은 5만원 정도가 무난하다고 생각한다. 엄청 친한 친구가 아니면 5만원 원칙을 지키는 편"이라며 "직장 동료를 넘어선 깊은 관계라면 10만원부터 시작한다"고 말했다. 공무원 이수진(31) 씨는 "5만원 축의금 문화(?)는 신권 때문에 생긴 것 같다. 5만 원권이 없을 때는 3만 원도 내고, 7만 원도 냈다"면서 "5만원권이 생기니까 만원짜리 몇 장을 내기가 모호하게 돼 축의금 5만원 문화가 굳어진 것 같다"고 풀이했다.
◆(박스) "차라리 안 주고 안 받아"
회사원 최모(32) 씨는 최근 청접장 석 장을 받았다. 직장 동료 1건, 고교 친구 1건, 고향친구 1건 등이다. 미혼인 최 씨에게 결혼식은 골치 아픈 행사다. 최 씨는 "축하하는 마음도 크지만 내가 언제 결혼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매달 나가는 축의금이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최근 축의금에 대한 인식을 바꾸자는 여론이 일고 있다. 특히 비혼을 선언하는 젊은층 사이에서 '안 주고 안 받자'라는 주장이 높아지고 있다. 회사원 한모(35) 씨는 "축의금을 내지 않는다고 결혼을 축하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면서 "최근 친구에게 미리 양해를 구하고 결혼식 참석 대신 커피 머신을 선물했다"고 했다.
결혼 계획이 없다는 김모(33) 씨는 "우리 사회에서 축의금은 주고 받는 것이지만 나는 받지 못하니 차라리 축의금 낼 돈을 모아서 여행을 갈 것"이라며 "이런 문화가 확산되면 축의금으로 머리 아파할 일도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이긴 하지만 '비혼식'을 열고 축의금을 받는 이들도 있다. 비혼식은 친구들을 초대해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는 취지의 선언을 하는 자리. 이모(39) 씨는 "비혼식은 평생 남의 결혼식에 축의금을 내지만 받을 일이 없는 비혼족들이 만들어낸 새로운 문화로 비혼을 알림과 동시에 사실상 축의금을 회수하는 자리"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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