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굣길, 산모퉁이를 돌아 마을 어귀에 다다르면 어김없이 만나는 길가 작은 기와집. 그 집의 문에 쓰인 낯선 글자 하나는 '영'(灵)이다. 영혼을 뜻하는 한자 '靈'의 속자임을 뒷날 알았다. 늘 굳게 잠긴 작은 이 집의 정체는 마을에 슬픈 일이 일어나면 드러났다. 바로 상엿집이었다. 동네에서는 마을 사람들이 모여 상엿집에서 끄집어낸 여러 나무 조각들을 이리저리 조립했다. 마침내 종이꽃 등으로 장식된 완성품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상여였다.
이어 다 꾸며진 상여 앞에서 누군가 '이제 가면 언제 오나~'며 구슬픈 목청으로 긴 선창을 노래했고, 상여를 어깨에 메고 뒤따르는 상두꾼이 부르는 후렴은 마을을 떠나 개울을 건너 수풀을 헤치고 없는 길을 내며 산속에 이를 때까지 계속됐다. 상복을 입은 행렬이 슬픔을 이기지 못해 통곡하며 그 뒤를 이었고, 마침내 평토제(平土祭)로 이승과 저승을 가른 뒤, 적막하고 황혼으로 어둠이 내린 산하를 벗어나면 상여는 해체돼 다시 '영'의 제집으로 돌아갔다.
삶에서 죽음에 이른 고인(故人)은 무덤에 갈 때 상여를 쓴 탓에 상두꾼의 수고로움이 필요했다. 물론 이익의 '성호사설'을 보면 사람 아닌 소나 말로 상여를 끈 일도 없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이처럼 사람과 소, 말이 동원됐던 상여 행렬은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하면서 이제는 자동차(영구차)로 바뀐 지 오래다. 장례도 일연 스님이 '삼국유사'에서 적은 매장·수장·천장 등 뭇 방법과 달리 화장이 대세로 자리하니 상여는 쓰임새가 없어졌다.
이런 즈음 (사)나라얼연구소가 19일 경북 경산 하양에서 이색적인 상여 행사를 개최, 관심을 끌고 있다. 과거 일제강점기 시절, 1938년 만주로 살길을 찾아 떠난 동포들이 우리 문화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 장례 때 쓰던 '만주상여'의 운구 재현 행사가 열린 것이다. 물론 만주상여는 중국 문화혁명 물결 때 불에 태워지는 곡절도 겪었다. 그러다 2001년 7월 한 동포 할머니 장례식 때 마지막으로 쓰인 뒤 2013년 경산에 옮겨져 이날 다시 등장한 셈이다.
장례 문화 변화로 사라진 우리 옛날 상여가 나라 잃은 망국의 애환 사연까지 간직한 만주상여로 우리 곁에 환생(還生)했으니 남다르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상여 자원인 만큼 제대로 보존 활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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