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 밝은 한송정(寒松亭)의 밤 / 월백한송야(月白寒松夜)
파도 잔잔한 경포대(鏡浦臺)의 가을 / 파안경포추(波安鏡浦秋)
애달프게 울면서 오고가는 건 / 애명래우거(哀鳴來又去)
한 마리 신의 있는 모래 갈매기 / 유신일사구(有信一沙鷗)
고려전기의 시인 장연우(張延祐, ?~1015)의 작품이다. 이런 시를 읽고, "정말 싱거운 시가 다 있군. 이 작품의 주제가 도대체 뭐야? 그래서 도대체 어쨌다는 건데?" 라고 말하지는 마시기 바란다. 그것이 궁금하면 이해의 열쇠가 숨겨져 있는 3, 4구를 되새김질 해보면 되니까.
신의가 있는 모래 갈매기는 무엇 때문에 이토록 애달프게 울어대며 왔다 갔다 하고 있는 걸까? 제 짝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작품 속의 갈매기는 잃어버린 제 짝을 찾아서 헤매고 있는 것이다. 갈매기가 신의가 있다고 한 것도 제 짝을 찾아 구슬프게 헤매는 바로 그 일편단심(一片丹心) 때문이다.
신의가 있는 것이 갈매기라면 신의가 없는 것은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한번 떠난 뒤에 감감 무소식인 작중 화자의 사랑하는 님이다. 요컨대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짝을 찾아 헤매는 갈매기를 노래하고 있지만, 실상 매정하게도 돌아오지 않고 있는 님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 왜 난데없이 한송정과 경포대가 등장할까? 님과 함께 놀았던 추억의 현장이기 때문일 게다. 달 밝은 밤에 솔바람 소리가 줄 없는 거문고를 연주하는 한송정을 함께 거닐기도 했고, 파도가 잔잔한 가을날에는 팔짱 끼고 경포대를 돌기도 했고. 한송정과 경포대가 강릉에 있었으니, 이 시의 화자는 아마도 강릉 사람일 게다.
"한송정 달 밝은 밤에 경포에 물이 잔 제 / 유신(有信)한 백구(白鷗)는 오락가락 하건마는 / 어찌다 우리 왕손(王孫, 님)은 가고 아니 오는고?"
위의 한시를 번역한 강릉 명기(名妓) 홍장(紅粧)의 시조다. 비교해보면 한시의 내용은 초장과 중장 속에 다 들어 있다. 그럼 종장은 무엇인가? 언어가 끝난 뒤의 여백에 숨어 있는 화자의 마음을 알아챈 홍장이, 미주알고주알 그것까지 죄다 번역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위의 한시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시의 전형이고, 말이 끝난 데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라고 할 수도 있다. 말하지 않고 말한 가운데 숨어있는 마음을 포착하지 못하면, "정말 싱거운 시가 다 있군. 그래서 도대체 어쨌다는 건데?" 라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말로 다 할 수 있다면 꽃이 왜 붉으랴" 시조시인 이정환의 '서시'(序詩)의 전부다. 말로 다 할 수 있다면, 꽃이 도대체 왜 붉겠는가.
이종문 시조시인, 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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