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많은 강원도는 가을 무렵 캔버스로 바뀐다. 그리고는 파스텔을 뒤집어쓴다. 산허리까지 칠해진 색이 요란하다. "단풍이, 색깔이, 우와"까지 딱 세 마디 나온다. 손은 카메라 셔터에 올라가 있다. 미색을 탐하면 발동되는 셀카의 유혹도 억누르기 힘들다.
소백산 넘어 점점 북쪽으로 향하자 산색의 채도가 점점 높아진다. 단풍철이 먼저 온다는 남이섬과 주변 관광 명소를 찾았다. 서울 사람들은 내친 김에 드라이브 코스로 다녀온다는 곳이다.
◆남이섬

강원도인줄 알았더니 경기도 가평이다. 배를 타는 선착장이 경기도, 남이섬이 강원도다. 경기도에서 강원도까지, 선착장에서 섬까지는 배로 불과 5분 남짓이다. 배는 쉴 새 없이 선착장과 남이섬 사이를 오간다. 남이섬 연락선 운항 총 횟수는 하루 637회. 배를 놓쳐 발을 동동 굴렀다는 말은 안 통한다.
18일 금요일에 찾았던 남이섬이었다. 휴일인가 싶었다. 평일 낮인데 탑승객이 꽉꽉 찬다. 춘천에서 아시안게임이라도 열린 걸까. 대부분은 외국인, 특히 동남아시아 관광객이 배 안 가득이었다. 매년 300만 명 넘게 남이섬에 들어오고 그중 120만 명이 외국인이라지만 우리말을 듣기 어려웠다.

외국인들이 어찌 여기까지 왔을까 궁금해 하던 순간 답은 곧 나왔다. 서울 인사동에서 가평을 거쳐 이들을 쉴 새 없이 토해내는 관광버스들이 주차장을 점령하고 있었다. 무슬림 관광객들을 위한 이슬람 기도실과 할랄 인증기관의 공인을 받은 레스토랑도 열었다니 말 다했다.
해외관광객을 그러모은 일등공신은 KBS 드라마 '겨울연가'(2001년)였다. 배용준과 최지우의 로맨스 열풍에 일본 중년 여성들이 성지순례하듯 이곳을 찾았다. 욘사마의 저력도 끝물인지 일본인들의 사진 찍는 신호, '이치, 니, 하이 치즈'가 안 들린다. 대신 '이, 얼, 싼', '원, 투, 쓰리'가 끊이지 않는다.

남이섬은 얼핏 해외 관광지에 온 느낌이다. 중국 관광객이 줄었다는데 도대체 줄기 전에는 어느 정도였을까. 짐작하기 쉽지 않다. 태국어, 베트남어, 중국어가 꾸준히 들린다. 단체로 질밥(인도네시아 여성 무슬림들의 히잡)을 쓴 인도네시아 여성들의 숫자도 만만치 않다.
◆민병도와 민병갈
드라마 덕이 아니라도 남이섬은 가을 정취의 대표적 명소다. 북한강 한가운데 있어 단풍색이 일찍 바뀐다.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해 뱃놀이 기분도 더한다. 5㎞ 산책로는 단풍나무와 은행나무, 메타세쿼이아가 특색있는 길로 조성돼 있다. 토끼, 공작, 다람쥐, 청솔모가 바쁘게 뛰어다닌다. 관광객도 조금 걷다 사진 찍기에 바쁘다.
MBC 강변가요제 무대로도 이름을 알렸던 남이섬은 원래 섬이 아니라 작은 봉우리였다고 한다. 1944년 청평댐을 만들 때 북한강 강물이 차올라 섬이 됐다. 이곳을 수재 민병도(1916~2006) 전 한국은행 총재가 1965년 사들여 다양한 수종의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민 전 총재의 수목 조림에 영향을 끼친 이는 민병갈 천리포수목원 원장이다. 충남 태안의 자랑인 천리포수목원을 조성한 민 원장은 국내 첫 귀화 미국인이었다. 본명은 칼 페리스 밀러(Carl Ferris Miller, 1921~2002). 미군 장교 출신으로 한국은행 상근고문을 지낸 인물이다. 그의 이름도 민병도에서 절반이 왔다. 한국은행 시절 민병도 총재와 형제처럼 지내 그의 성과 돌림자를 땄다고 한다.
남이섬은 섬 북쪽 돌무더기에 남이장군이 묻혀있다는 구전에서 이름 붙었다고 한다. 조선 세조 때 인물로 스물여섯 나이에 병조판서에 올랐던 남이장군은 예종 즉위 이후 고변으로 숙청된다. 그의 활약과 억울한 죽음 역시 구전으로 각색됐는데 실제 무덤은 경기도 화성에 있다. 섬 북쪽, 섬 입구와 멀지 않은 곳에는 남이장군의 가묘가 있다. 민병도 전 총재가 남이장군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봉분을 쌓고 추모비를 세운 것이라 한다.
◆남이섬 남쪽, 청평호반

75번 국도를 타고 남이섬 남쪽으로 달리면 청평호반 드라이브 코스로 연결된다. 북한강을 따라 달리는 391번 지방도로 갈아타면 어디든 멈추고 쉬어가는 게 순리다. 청평호가 눈에 와서 박히는데 운전을 이어갈 재간이 없다. 각 기업의 연수원과 예쁜 카페들이 몰렸을 정도로 풍광이 빼어난 곳이다.
이국적인 공간 '쁘띠프랑스(Petite France)'라는 곳도 청평호반의 풍경을 거든다. 원색의 지붕과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못 보고 지나치기 어렵다. 직역하면 '작은 프랑스'다. '꽃과 별, 그리고 어린왕자'라는 구호를 내민다. 실제로 프랑스의 작은 마을처럼 보인다. 프랑스의 상징 에펠탑도 제자리를 잡고 있다.

어린왕자의 작가 생텍쥐베리, 어린아이들의 감성 자극제 오르골 등을 소재로 공간을 꾸몄다. 21세기인 2008년 문을 열었지만 1800년대 프랑스의 느낌을 내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 19세기 프랑스 가옥을 그대로 옮겨와 재현한 '프랑스 전통주택 전시관', 프랑스 벼룩시장 분위기를 재현한 '골동품 전시관', 유럽 인형 300여점이 전시된 '유럽인형의 집'이 줄지어 있다. 동화 같은 공간이다.

쁘띠프랑스도 유명 드라마에 배경으로 나와 존재감을 알렸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다. 오히려 드라마도 색감 좋은 이곳의 덕을 봤다. 건물의 채도가 높아 대충 찍어도 작품 사진이 나온다. 최근 들어 쁘띠프랑스 옆에는 공사가 한창이다. 이탈리아 마을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한다. '작은 이탈리아'라는 뜻의 '피콜라 이태리(Piccola Italy)'다. 피노키오관, 다빈치관 등 건물에 이탈리아 골동품이 채워질 예정이라 한다.
◆남이섬 서쪽, 축령산 아침고요수목원

남이섬에서 서쪽, 그러니까 조금 더 서울 쪽으로 가면 '가평잣'의 아성을 만들어낸 축령산이 나온다. 축령산에 기댄 조림은 오랜 기간 수도권 주민들의 안식처가 돼왔다. 경기관광공사가 자랑하는 '잣향기푸른숲'과 '아침고요수목원'이 쌍끌이로 휴양 겸 나들이에 나선 관광객들을 모은다.
아침고요수목원은 사계절 인기가 높지만 가을이 좀 더 제격이다. 특히 남이섬, 쁘띠프랑스, 아침고요수목원은 국내 여행객들에게도 패키지 세트처럼 인식돼 시너지 효과를 낸다. 거리도 각각 30분 남짓으로 '억지 패키지'가 아니다. 평일임에도 관람객의 물결이 축령산 중턱에서 출렁인다. 남이섬에서 본 얼굴들이 또 보인다.

1996년 문을 연 이곳은 산 중턱에 군집해있는 나무들에 의존한 수목원이 아니다. 소설 전개 방식으로 비유하자면 절정에서 시작해 절정으로 끝나는 단편소설이다. 축령산 산림자원을 활용해 적당히 공간을 만들고 어울리는 이름과 사연을 갖다 붙일 법도 하지만 그런 공간이 없다.
여러 주제의 정원이 28곳이다. 지도로만 봤을 때는 '언제 이걸 다 보나' 싶지만 마음만 먹으면 단박에 돌 수 있을 만큼이다. 그만큼 오밀조밀하게 테마를 갖고 조성된 수목원이다. 1천년 수령의 향나무 '천년향'을 비롯해 '오두막정원', '하늘길' 등 일부 구간에서는 줄을 서서 사진을 찍는다. 이런 모습은 출입구에서 가장 먼 '서화연'까지 이어진다. 이곳 역시 드라마와 영화 촬영 장소로 여러 차례 소개돼 유명세를 치르는 중이다.

◆춘천 가는 기차, 아니고 중앙고속도로
춘천은 훈련소 가는 길이 눈에 선할 만큼 입영의 추억이 남아있는 도시다. 의정부 306보충대와 쌍벽을 이룬 102 보충대가 춘천에 있었다. 2016년 8월 19일을 끝으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된 곳이다.
안타깝게도 춘천은 멀었다. '떠나요, 둘이서'로 시작하는 '제주도 푸른밤' 만큼이나 '조금은 지쳐 있었나봐'로 시작하는 '춘천가는 기차'를 흥얼거리며, 술을 마시다 술김에라도, 버스 타고 갈 수 있는 물리적 거리가 아니었다. 그나마 대구에서 춘천까지 중앙고속도로가 완전 개통된 게 2002년이었다. 온종일 걸리던 게 3시간대로 줄었으니 획기적인 시간 단축이긴 했다.

남이섬까지 왔다면 춘천을 대충 넘기기 아깝다. 알고 보면 춘천은 관광에 최적화된 도시다. 의암호를 낀 호반의 도시이자 닭갈비와 막국수, 감자옹심이 막강 트리오를 앞세운 식도락의 도시다.
시간 사정상 춘천에서 단 하나만 볼 수 있다면 '소양강 스카이워크'를 권한다. 투명 유리 구간이 156m에 이르는 수상 전망대다. 7.5m 아래 소양강에 소스라치게 놀라다가 투명 유리 바로 아래 끼어있는 수많은 동전에 혹한다. 모든 관광지의 동전은 소원 성취 용도이거늘. 액수로 보면 정성이 부족하다는 말이 나오겠으나 그 틈에 어떻게들 집어넣었는지 노력은 가상하다.

스카이워크는 물 맑은 동네 민물고기의 대표격인 '쏘가리상' 앞까지 이어진다. 인증샷 촬영 장소다. 뒤쪽으로 춘천시내 아파트 단지들이, 옆으로는 큼직한 소양강처녀상이 눈에 들어온다. 입장료가 있다. 2천원이다. 입장료는 곧 '춘천사랑상품권' 구입비가 된다. 대개는 바로 앞 가게에서 음료를 사 먹는 데 쓰지만 춘천시내 음식점 등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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