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종의 명으로 1478년 편찬한 "동문선"에는 최치원이 908년에 찬술한 '신라 수창군호국성 팔각등루기'가 수록돼 있다. 내용을 간추리자면, 호국의영도장(護國義營都將) 중알찬(重閼粲) 이재(異才)가 신라 말기의 혼란한 사회상을 극복하기 위해 팔각등루를 건립하기로 결심하였다고 적혀 있다.
889년 사벌주(상주)의 원종·애노의 농민 봉기를 시작으로 전국적인 농민들의 저항이 들불처럼 번져갔고, 신라 왕실에 반발한 여러 지역의 호족들은 반신라적인 입장에서 자립하여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반면에, 수창군 태수로 부임하여 수창군을 통치하던 이재는 친신라적인 정치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 최치원이 그를 '나라를 받드는 충신'으로 평가했던 점과 이재 자신이 일으켰던 근거지를 '호국성'으로, 스스로를 '호국의영도장'이라고 가리켰던 점을 들어 확인할 수 있다.
이재가 받았던 관등인 중알찬은 6등급 관등 아찬의 중위(重位)인 중아찬(重阿湌)을 의미하는데, 이는 6두품만이 차지할 수 있는 관등이었다. 이에 이재는 6두품의 자격으로 수창군을 다스리던 중에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자, 드디어 수창군 태수직을 포기하고 호국성을 축조하여 호국의영도장(호국성 장군)을 자칭하며 호족으로 성장하였다. 이재의 통치 권역은 호국성을 대구읍성 자리로 추측하였을 경우, 수창군의 대구현·팔리현·하빈현·화원현 및 장산군의 해안현을 포함하는 것으로 추정되며, 그의 권력 기반은 세력권 내외 농민층과 동화사의 승려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수창군 호국성을 거점으로 친신라적 성격이 강했던 대구 호족 이재는 왕건과 견훤의 쟁탈전이 가속화되는 과정에서 세력을 상실하였다.
앞으로 대구읍성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호국성의 존재를 상기하며 그 흔적을 찾아내려는 의지가 수반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대구 호족 '이재'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에 대한 연구가 더욱 진척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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