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120여 호였던 한개마을은 이제 75집으로 줄어도 여전히 살필 게 많다. 특히 일제 침탈의 흔적으로, 기왓집이 사례다. 일제 때 초갓집도 많았다. 그러나 "일제의 짚 공출(供出)로 어쩔 수 없이 기와로 바꾸는데 기와를 일본인이 팔아 일본인 뱃속만 채워준 꼴"이란 진사댁 고(故) 이영성 후손의 증언(곽명창 해설가)이 그렇다.
또다른 침탈 사연은 '해저댁'(海底宅)의 '중국식' 한옥에 있다. 강제징용으로 한옥 기술자가 없어 중국인을 쓴 결과 그렇게 됐다는 도덕순 관광해설사의 설명이다.

분단 현실의 흔적도 있다. 학자배출 명당터로 알려진 마을 뒤쪽, 가장 높은 위치-향교의 가장 높은 데 최고 위계의 대성전을 세우둣-의 등고선 70m쯤의 한주종택이 그렇다. 대문 양철판 글귀는 잠시나마 '반공국시'(反共國是) 시절로 안내한다.
대문 한쪽에 '반공, 멸공통일', 다른 쪽엔 '방첩, 상기하자 6·25'란 빛 바랜 문구가 희미하다. 지난날 넘쳐났을 법한 '반공·방첩' 구호가 학자집 대문에까지 걸렸으니 잠시 과거로 시간여행에 나선 듯하다. 정인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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