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성주 생활사 스토리텔링] <9> 한개마을, 별고을 빛내다

이석문이 사도세자를 안타까워하며 남쪽 대문을 북쪽으로 낸 사연을 간직한 북비. 박노익 선임기자 noik@imaeil.com
이석문이 사도세자를 안타까워하며 남쪽 대문을 북쪽으로 낸 사연을 간직한 북비. 박노익 선임기자 noik@imaeil.com
이원조가 학문을 권장한 것을 기려 유림이 세운 쇠로 된 비석인 흥학창선비는 성주 가천면의 만귀정에 있다. 성주군 제공
이원조가 학문을 권장한 것을 기려 유림이 세운 쇠로 된 비석인 흥학창선비는 성주 가천면의 만귀정에 있다. 성주군 제공
이원조 영정
이원조 영정
이진상 영정
이진상 영정
이승희 사진
이승희 사진
한개마을 응와종택은 판서까지 역임한 응와 이원조로 널리 알려진 고택이다. 집 안에서 본 응와종택 대문. 성주군 제공
한개마을 응와종택은 판서까지 역임한 응와 이원조로 널리 알려진 고택이다. 집 안에서 본 응와종택 대문. 성주군 제공
한개마을 응와종택은 판서까지 역임한 응와 이원조로 널리 알려진 고택이다. 응와종택 안 모습. 박노익 선임기자 noik@imaeil.com
한개마을 응와종택은 판서까지 역임한 응와 이원조로 널리 알려진 고택이다. 응와종택 안 모습. 박노익 선임기자 noik@imaeil.com
한개마을 응와종택은 판서까지 역임한 응와 이원조로 널리 알려진 고택이다. 집 밖에서 본 응와종택. 성주군 제공
한개마을 응와종택은 판서까지 역임한 응와 이원조로 널리 알려진 고택이다. 집 밖에서 본 응와종택. 성주군 제공

한개마을은 인재 배출 고을이다. 특히 충절(忠節)의 돈재 이석문(李碩文)과 증손으로 18세에 문과급제, 선정(善政)을 베푼 응와 이원조(李源祚) 판서, 130여명 문인의 한주학파를 일군 현손 한주 이진상(李震相)으로 나라와 경상도 문중에 성주와 가계를 빛냈다.

한계 이승희(李承熙) 역시 부친 한주의 학맥 중심에서 유학을 잇다 중국에 망명, 독립운동가로 삶을 마쳤고 두 아들(기원·기인)도 독립운동에 투신, 3부자 독립운동 명문가가 됐다. 한개마을은 기업가 출신 자산가 이수빈 갑부(甲富)도 냈으니 고위 관료(판서), 대학자(한주학파), 부자 배출에 6명의 동족 독립유공자 서훈의 명당터로 불릴 만하다. 여기에 이세동 경북대 교수 주장처럼 일제 때 바꾼 마을이름 대산리(大山里)를 옛 대포리(大浦里)로 되찾으면 금상첨화일 터이다.

◆별고을 빛낸 한개마을 이석문·이원조

한개마을 인물은 흔히 과거급제 수로 설명되는데, 입향조(이우) 이후 관료나 인물 배출이 뜸했다. 광해군 4년(1612), 이우의 6대손인 이정현(1587~1612)이 입향 이후 첫 문과급제할 때까지 침묵했다. 그러다 급제와 함께 26세로 요절한 이정현 외아들 이수성의 7명 아들 중 3남인 달한(達漢)의 손자 이석문의 무과급제 뒤 과거제 폐지(1894년)까지 대과급제 9명(이석문 무과 포함 10명), 소과급제 24명의 후손이 나와 한개마을을 알렸다.

특히 한개마을 인물에서 1694년 갑술환국(숙종 20년) 이후 노론(老論) 득세로 남인(南人) 입지가 좁아진 시절, 1739년 27세로 무과급제한 이석문(1713~1773)과 1809년 18세 소년등과해 판서를 지낸 이원조(1792~1871)가 두드러진다. 숙종은 당파를 누르려 3차례 정국의 전환(환국)을 주도했는데, 결국 남인 몰락과 노론 지배 구조였다. 그런 만큼 경상도(영남)의 관료 진출과 출세는 드물었으니 충절의 표상이 된 이석문과 선정의 족적을 남기고 뒷날 유림 불천위로 확정된 이원조는 집안에서도 받들 만한 인물이었다.

이석문은 노론과 거리를 두다 좌천과 수난을 겪었다. 또 1762년 죽음을 앞둔 사도세자와 아들(세손·뒷날 정조)의 부자(父子) 상면을 위해 영조의 명을 어기다 죄를 얻어 곤장을 맞고 낙향, 세자를 그리며 남쪽 문을 북쪽으로 내면서 '북비공'(北扉公)이 됐다. 북비에는 다른 사연도 있다. 이석문이 한개에 칩거할 때 노론인들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집 앞을 지나자 '시류에 아첨하는 무리들과 접하기 싫다'며 북비를 냈다는 이야기다. 이런 그를 기억한 정조는 뒷날 관리(문과급제)가 된 손자 이규진(李奎鎭)을 불러 "너의 조부가 세운 공이 아름답다"며 눈물을 흘린 사연은 유명하다. 작가 하용준은 '북비' 소설을 7권(총 15권 예정)까지 펴냈다.

◆한개마을 양자(養子) 대잇기와 인물 배출

한주종택은 유학자 이진상과 이승희 부자가 살았고, 독립운동가로 서훈된 이승희와 그 두 아들이 나고 자란 곳이다. 성주군 제공.
한주종택은 유학자 이진상과 이승희 부자가 살았고, 독립운동가로 서훈된 이승희와 그 두 아들이 나고 자란 곳이다. 성주군 제공.

한개마을의 양자 가계 잇기는 남다른데, 4대(代)에 걸친 사례가 있다. 이석문은 아들 민겸(敏謙)·민검(敏儉) 중 민검을 동생 석유(碩儒)에게 양자로 보냈다. 민겸 역시 아들 규진(奎鎭)·형진(亨鎭) 가운데 아들이 없는 동생 민검에게 둘째(형진)를 양자로 주었다. 이번엔 이석문 손자 규진이 아들이 없자 동생 형진은 아들 원호(源祜)·원조(源祚) 중 둘째(원조)를 규진에게 양자로 보냈다. 원조는 아버지(이규진)에 이은 부자 급제와 함께 18세 소년등과로 이름을 날렸다. 이석문-민겸-규진-원조까지 4대 양자 사연은 지금도 회자된다.

한개마을 양자 잇기에는 당색(黨色)의 애환도 진한데, 이원조 부자(父子)가 그렇다. 노론 득세 속 경상도 홀대와 배척의 당파 지형에서 남인인 이원조는 비록 판서까지 올랐지만 벼슬길은 고단했다. 오죽했으면 70세 넘어 기로소에서 그가 1865년 신년 포부로 "올해는 나도 노론 한번 돼 봤으면 좋겠소"라고 말했을까. 이런 그였지만 동네 10촌 아우로 노론인 원규(源奎)가 죽자 그 아내가 남편 유명이라며 그의 아들을 양자로 청하자 셋째 아들 구상(龜相)을 양자로 보냈다. 이구상은 문과 장원급제 뒤 홍문관 교리를 지내며 집안을 잇고 두 집안에 두루 잘 했으니 명성을 얻고 남았다.

이원조는 친형이나 양자로 8촌간이 된 이원호와 우애가 남달라 형의 아들인 조카 이진상을 아꼈고, 이에 이진상은 학문으로 이름을 높여 퇴계학맥의 한주한파를 형성했다. 이진상 아들 이승희도 아버지 학맥을 잇고 나아가 두 아들과 함께 독립운동가로 족적을 남겼다. 이승희 5촌 조카 이기정(李基定)과 일족인 이기윤(李基允)·이기형(李基馨) 역시 독립운동가로 추서돼 이석문의 충절을 이었다. 한편 이원호 둘째 아들로, 이진상 동생인 이운상(李雲相) 후손 이수빈(李洙彬)도 양자로 월곡댁 가계를 잇고 삼성생명 회장 등 대기업 경영자로 이름을 날렸다. 한개마을이 고관·대학자·독립운동가·갑부 배출로 별고을을 빛낸 인재 명당으로 이름을 얻을 만하다. 정인열기자 oxen@imaeil.com

한주종택은 유학자 이진상과 이승희 부자가 살았고, 독립운동가로 서훈된 이승희와 그 두 아들이 나고 자란 곳이다.박노익 선임기자 noik@imaeil.com
한주종택은 유학자 이진상과 이승희 부자가 살았고, 독립운동가로 서훈된 이승희와 그 두 아들이 나고 자란 곳이다.박노익 선임기자 noik@imaeil.com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