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재가 입을 열었다. 그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알려졌지만 끝까지 범행을 부인했었다. 굳게 닫힌 그의 입을 열게 한 것은 국과수의 DNA 검사 결과가 아닌 라뽀 (rapport) 였다. 경찰은 프로파일러와 라뽀가 형성된 상태에서 증거를 제시하자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고 했다. 라뽀는 '관계형성'을 일컫는 전문용어다. 도대체, 라뽀가 뭐길래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연쇄 살인사건이자, 30년도 지난 대표적인 영구 미제사건의 용의자가 자백을 하게 된 걸까?
80세 할머니가 걸으면 숨이 차서 병원에 왔다. 가족들은 나이 들면 숨이 찰 수 있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병원에 왔더니 심장정밀 검사를 해 보자고 해서 다소 의아한 상태로 입원을 했다고 한다. 할머니도 췌장암으로 수술 후 가족들이 걱정을 많이 했는데 별것도 아닌 걸로 다시 입원하게 되었다며 다소 겸연쩍은 웃음을 보였다. 의료진도 검사만 하고 끝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심장혈관 상태는 모두의 예상을 비웃기나 한 듯이 매우 심각했다. 좌주간부에 혈관이 찢어진 박리소견과 함께 분지부 협착소견을 보였다. 당장 치료를 하지 않으면 돌아가실 수도 있는 위험한 상태였다. 하지만, 좌주간부 분지병변의 스텐트 시술은 좋은 결과를 장담하기 어려운 위험한 시술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스텐트 시술 보다는 심장수술이 권장된다. 요즘 같이 하루가 멀다 하고 의료인 폭행, 의료 사고 등에 관한 언론보도가 지면을 장식하고 있는 의료환경에서는 위험한 시술은 피하고 싶었다. 차마 80세 고령으로 췌장암수술까지 한 할머니를 다시 수술대에 눕히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떡해야 할까?
가족들은 대수롭지 않은 상태라고 생각하고 입원했고 의료진도 예상치 못한 결과에 직면했다. 이 경우 전문가인 의사는 자신의 판단에 따라 치료방법을 결정할 수 있다. 그렇지만 기대만큼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고 환자가 위험에 빠지는 경우 의사는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선의로 한 행동이고 전문가의 판단이지만 그것이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많은 의학적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비단 의료현장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환자와 그의 가족들도 인생에서 많은 경험을 통해 선의가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런 상항에서 중요한 것이 환자와 의사 및 환자의 가족과 의사 사이의 라뽀이다. 의료영역에서 라뽀는 단순한 '관계맺기'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의사와 환자. 생명을 걸고 맡기는 관계, 둘 사이에 맺어지는 깊은 신뢰감을 의미한다.
나는 밖에서 대기중인 가족들을 안으로 불러 환자의 상태와 시술의 위험성을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가족들은 다행히도 상황을 잘 받아들였고 자세한 설명에 고마워 했다. 그리고, 의료진을 신뢰하며 다소 위험한 스텐트 시술을 선택했다. 예상대로 시술은 쉽지 않았다. 아찔한 고비를 몇 번 넘기고 가슴을 수 차례 쓸어 내린 끝에 시술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이런 위험천만한 시술을 하고 나면 의료진들은 수명이 줄어든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하지만, 의료진의 줄어든 수명만큼 환자는 새 생명을 더 얻었으니 의사와 환자 두 사람의 인생은 더 풍성해지지 않았을까?
이장훈 경북대병원 순환기내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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