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수리나무는 우리나라 전통시대의 대표적인 구황식물이었다. 어려울 때 목숨을 구해준 구황식물은 본초학의 중요한 연구 대상이었다. 약효를 중심으로 이해하는 본초학은 전근대 시기의 식물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가장 잘 보여준다. 그런데 지금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부분, 심지어 식물학자조차도 식물을 본초학으로 이해하는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본초학에 기초한 식물 인식은 모든 식물을 약효로만 바라보는 한계를 지닌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나라 사람들 중 대부분이 식물을 보면 가장 먼저 약효를 따진다. 식물원조차도 식물 이름표에 약효를 적는다. 어려운 시대가 아닌 요즘도 가을철 산에 가면 참나뭇과의 갈잎큰키나무 상수리나무나 굴참나무의 열매를 줍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식물에 대한 본초학적 인식에서 벗어날 때 우리나라의 국민은 선진국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
상수리나무가 열매를 떨어뜨려 새로운 생명을 준비하는 계절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간이다. "회남자" '시칙'에는 12월을 다음과 같이 바라보았다.
천자는 현당(玄堂)의 좌개(左个)에서 조회를 하고 관리들에게 명령을 내린다. 즉 사방에 개고기나 양고기를 찢어놓고 크게 푸닥거리하게 하고, 흙으로 빚은 소를 밖에 내놓게 한다. 어업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물고기 잡이를 시작하게 하고, 천자도 몸소 나아가 물고기를 잡으며, 잡은 고기를 태묘에 먼저 올린다. 백성에게는 오곡의 씨앗을 꺼내 놓게 하고, 농업 담당 관리에게는 씨 뿌릴 일의 계획을 세우게 하고 가래 보습 등의 쟁기를 수리하여 농기구를 갖추게 한다. 악사에게는 대규모의 합주를 연주하게 한 후 한 해의 음악 활동을 마감하게 한다. 그런 다음 산림을 관리하는 담당자에게 명령하여 땔나무를 거둬들여 종묘 제사와 각종 제사에 사용하는 땔거리를 공급하게 한다.
상수리나무의 이름은 임진왜란 때 피란 갔던 선조가 피란지에서 먹은 도토리묵을 환궁해서도 수라상에 올린 것과 관련이 있다. 묵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도토리는 털로 덮여 있다. 상수리나무의 열매는 같은 과의 굴참나무와 거의 같다. 그래서 두 나무를 구분하기 위해서는 잎을 봐야 한다. 상수리나무의 잎은 앞뒤의 색깔이 거의 같은 반면 굴참나무의 잎은 앞뒤의 색깔이 다르다.
상수리나무의 한자는'역'(櫟)이다. '역'은 '쓸모없는 자' 혹은 '장수'를 의미한다. 그 이유는 중국 전국시대 장주가 편찬한 "장자-인간세"에 등장하는 제나라 근처 곡원의 사당 앞에 살고 있는 상수리나무에 얽힌 우화 때문이다. 이곳의 상수리나무는 굽어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은 덕분에 천명대로 살 수 있었다. 상수리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쓸모 있는 존재로 살아갈 수 있었던 '무용지용'(無用之用)의 철학을 낳은 나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장자"에 등장하는 우화를 모방해서 '역옹'(櫟翁)의 호를 사용했다. 그중에서 고려시대 이제현의 "역옹패설"(櫟翁稗說)은 자신의 호를 딴 작품이다.
무용지용의 철학은 생명체에 대해 비교하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은 쓸모를 기준으로 가치를 판단한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생명체의 가치는 같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따라 생명체의 가치를 판단한다.
내가 자주 다니는 대구시 북구 구암산에는 콩과의 갈잎큰키나무인 아까시나무가 상수리나무와 더불어 많이 살고 있다. 산등성이 등산로 주변에도 아까시나무가 적지 않게 살고 있다. 그중에 한 그루가 상수리나무의 뿌리와 얽혀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곳에 가보니 누군가가 상수리나무는 살려두고 아까시나무만 잘라버렸다. 지금 아까시나무는 목이 날아간 채 죽은 모습으로 남아 있다. 나는 아까시나무를 자른 사람의 심정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까시나무를 쓸모없는 존재로 여겼다는 사실이다. 구암산의 아까시나무는 쓸모가 없어서 천수를 누리기는커녕 영문도 모른 채 타살되어 버렸다. 인류의 역사에서 구암산의 아까시나무처럼 아무 이유도 모른 채 위대한 목숨을 잃어버린 존재가 아주 많다. 구암산의 아까시나무를 벤 자의 행동은 만행이다. 생명에 대한 만행은 인간의 행동 중 가장 나쁜 것이다. 아까시나무에 만행을 저지른 사람은 지금 아까시나무의 꽃으로 만든 꿀을 맛있게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등산객들 중에는 이같이 끔찍한 일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죄의식도 갖지 않고 버젓이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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