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은 한국 독립운동의 발상지이다. 나아가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사에서 선구적인 모습을 보였다. 일제 침략에 맞서 고유한 문화와 민족성을 지켜냈다. 자립경제를 내세운 국채보상운동 등 다양한 방식의 항쟁을 벌였다. 국내는 물론 세계 속에서 독립운동을 했다. 남녀평등을 명시한 임시헌장 정신처럼 여성들도 독립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독립운동의 성지, 대구경북
대구시와 경상북도는 이달 4, 5일 경북 안동과 대구에서 '대구경북 독립정신 계승·발전 국제세미나'를 열었다. 이번 행사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 올해 한국 독립운동에서 중심 역할을 했던 대구경북 사람들과 그들이 펼쳤던 독립운동을 다시 조명하고자 마련됐다.
첫날 안동에서 열린 개회식에서 권영진 대구시장은 "우리가 대한민국의 중심이었다는 말을 할 정도로 독립운동을 위해 대구경북의 많은 인사가 몸을 던져 나라를 되찾았다"며 "당시의 의지를 이어받아 이제는 대구경북이 다시 하나로 나가야 한다"고 밝혔다.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엄혹했던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 유공자를 전국에서 가장 많이 배출한 항일 독립운동의 성지, 안동에서 행사를 열어 기쁘게 생각한다"며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 말씀처럼 우리 선조의 독립운동 정신은 민족 재생과 미래 생존이 걸린 잊어서는 안 되는 역사적 교훈"이라고 강조했다.
김희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장은 기조강연을 통해 '대구경북인이 펼친 독립운동의 세계사적 의의'를 제시했다. 한국 독립운동사의 시작은 1894년 안동에서 일어난 갑오의병으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대한 항쟁이었다.
한국 독립운동은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사에서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운 선구적인 모습을 보였다. 일제 침략과 통치정책이 민족말살정책이었지만 자신의 고유 문화와 민족성을 확고하게 지켰다. 독립운동가들은 한글 연구와 보급, 조선어학회 활동, 한국사 보급 등에 힘써 국학 민족주의를 이뤄냈다.
김 관장은 "한국은 독립운동을 통해 근대국가를 건설한 특징을 가지고 있고,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3조에는 남녀평등을 명시할 만큼 근대 지향성을 분명히 나타냈다"며 "이러한 활동 배경에는 한국 독립운동 51년 역사의 출발점인 안동 갑오의병과 대구경북인들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3·1운동의 전개와 정신'을 발표한 김일수 경운대 교수는 "대구 3·1운동은 3월 8일 서문시장에서 시작해 2개월에 걸쳐 경산과 경주 등 경북으로 확산됐다"며 "민족 계몽운동과 연계하면서도 학생과 청년, 노동자 등 다양한 세력이 참여했다. 이를 통해 역사의 주체로서 민족 개념을 확고히 했고, 공화주의 이념의 정립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도 기여했다"고 말했다.
◆세계 속으로 나아간 독립정신
대구경북인의 독립운동은 국내는 물론 국외로 뻗어갔다. 독립운동은 유럽과 미주, 중국, 러시아 등 한인이 거주하던 모든 곳에서 전개됐다. 국외에서 활동하던 인물과 세력은 그 지역과 국가의 정치성향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중국과 일본, 미주지역의 정치적 상황은 서로 달랐고, 그 속에서 전개하던 독립운동도 다른 형태를 보였다.
무엇보다 활동지역의 반침략 투쟁과 연계해 공동 항전을 펼쳤다. 중국에서는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 정부에 각각 국제 연대를 추구했다. 중국공산당과 조선의용군의 연대, 동북항일연군 참가와 기여, 한국광복군과 미국 OSS부대의 합작, 임팔(Imphal) 전투에서 보인 한국광복군과 영국군의 합작 등은 모두 국제적 연대활동의 대표적 사례이다.
김태국 중국 연변대학교 인문사회과학학원 교수는 중국에서 발행된 '대련신문'에 나타난 내용을 토대로 설명했다. 중국에서 발행된 일본어 신문인 대련신문은 지정학적 차원에서 막대한 정보량을 기반으로 한국과 관련된 기사만 1천150여 개에 달할 정도로 한국 독립운동사에 관련된 많은 내용을 보도했다.
조규태 한성대학교 인문학부 교수는 '중국 북경에서의 대구경북인 항일독립운동 연구'를 발표하며 대구경북인이 북경지역으로 대거 이주해 활동했던 보합단과 국민당, 제2차 유림단 등의 활동을 소개했다.
일본에서도 항쟁이 이뤄졌다. 정혜경 서울시 문화재위원 박사는 '일본에서 전개된 대구경북인의 항일투쟁'을 발표했다.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박열과 안동 출신인 김지섭은 1920년대 일본에서 항일 의거를 벌였다. 이후에도 일본 내 항일투쟁이 계속됐다. 예천이 고향이 정휘세는 일본 관서지역에서 사회운동가로서 활동하다 옥중에서 순국했다. 안동 출신인 김동택은 오사카에서 노동운동과 교육사업에 참가했다.
김도형 독립기념관 연구위원은 "1903년 노동 이민을 시작으로 미국 하와이에 한인사회가 형성됐다. 여기에는 대구경북 출신도 적지 않았고 독립운동가도 있었다"며 "현지에서 단체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후원하는 등 고된 삶을 살면서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고 소개했다.
◆국채보상운동과 여성 독립운동
자발적 참여로 진행된 대구 국채보상운동은 자립경제를 내세운 독립운동이었다. 지역민이 나서서 국채를 갚음으로써 독립 국가를 실현하고자 했고, 이러한 정신은 오늘날 외환위기를 극복하는 힘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형목 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은 이런 내용을 담은 '대구 국채보상운동의 정신과 시대적 가치'를 발표했다. 김 연구위원은 "자발적인 참여가 국민운동으로 이끌었고, 사회적인 책무로 시대적 가치를 실현했다"고 국채보상운동을 평가했다.
일제는 당시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고자 1906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1천150만원에 달하는 차관을 빌려줬고, 이는 당시 대한제국정부의 1년 예산에 이르는 거금의 외채였다. 이에 1907년 대구광문사 사장 김광제와 부사장 서상돈 등을 중심으로 국채보상운동을 시작했고, 국내는 물론 국외 한인사회로 퍼졌다.
김 연구위원은 "국채 보상의 목적은 자립경제를 수립해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며 "당시 고조된 반일의식 분위기와 맞닿아 '국채상환은 국권회복'이라는 인식이 확산돼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했다. 국채는 민족생존권과 직결된 절박한 현실문제였다"고 설명했다.
한국 독립운동에서 여성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국채보상운동은 지역 여성운동의 태동이었다. 1907년 2월 남일동패물폐지부인회가 시작됐고, 이어 국채보상탈환회와 대구남산국채보상부인회 등이 활동했다.
3·1운동과 만주지역 항일투쟁에서 지역 여성들은 빼어난 활약을 했다. 대표적으로 경북 영양의 남자현은 1896년 의병항쟁에 나선 남편이 전사한 이후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서울로 올라가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대구 신명여학교 성경 교사였던 임봉선은 여학생 50명과 함께 서문시장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1911년부터 지역인의 만주망명이 이뤄졌고, 여성들도 함께했다. 이들은 독립운동의 텃밭을 일구는 역할을 했다. 생활 안정과 자치단체 유지에 여성들이 중요한 부분을 담당했다. 만주지역 독립전쟁에서도 후방 지원을 하며 함께 싸웠다.
강윤정 안동대 교수는 "비록 적은 수이지만 지역 여성들은 꾸준히 민족의식을 키우며 항일투쟁을 펼쳤다"며 "남녀 귀천과 빈부의 계급을 떠나서 모든 계층의 여성이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여성의 존재를 사회 구성원으로 인식하는 성과를 만들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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