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야고부] 독립운동가의 편지

정인열 논설위원
정인열 논설위원

"부주(父主) 전상서(前上書)…조국이 해방되었으므로…불구(不久)에 귀국하겠습니다…자식(子息)은 금년 정월 7일에 안공근 씨의 차녀 안금생과 결혼하였습니다. 안은 조선의 의사(義士) 안중근 씨의 질녀이옵니다…이만 그치고 부주의 강일(康日)을 요축(遙祝)하옵나이다. 자식 한재수(韓再洙) 상(上). 중국에서 사용하는 이름은 한지성이라 하고 있습니다. 11월 5일 중국 중경."

올해는 한국 독립을 위해 중국에서 '조선의용대통신'(朝鮮義勇隊通訊·뒷날 '조선의용대'로 개칭)이란 홍보 잡지를 발간한 지 80년을 맞는 해이다. 한국인 첫 무장 군사조직인 조선의용대(대장 김원봉)가 1938년 10월 10일 중국 무한에서 조직되자 기관지로 이듬해 1월 15일(추정) 창간돼 1942년 4월까지 나왔으니 3년 넘는 역사인 셈이다.

조선의용대의 대적(對敵) 선전공작 목적으로 펴낸 유가 잡지로, 첫해는 매달 1~3회, 1940년에는 모두 8회, 1941~1942년 겨우 두 차례씩 펴냈으니 42회에 걸쳐 발간됐다. 모든 게 힘든 때라 발행 주기와 지면 수(8~32면)도 고르지 못했다.

조선의용대가 주로 대적 선전과 정보 수집, 포로 교육과 공작 활동을 벌이다 1942년 한국광복군에 흡수되자 기관지도 1942년 4월 1일 42기로 끝났지만 업적은 빛났다. 특히 대구경북인의 활약은 평가할 만하다. 필진이 그렇다. 창간~종간호까지 등장한 글쓴이 112명이 372편을 썼는데, 경북 성주 출신 한지성(13차례)과 대구 달성 인물인 이정호(12차례)와 그 부친 이두산(8차례)은 주요 필진이었다. 특히 대구공립상업학교 졸업 뒤 망명한 한지성은 중국어판 주편(主編)을 맡았다.

112명 필진 가운데 세 번째 많은 글을 쓴 만큼 한지성은 고향에도 숱한 글을 보냈다. 하지만 지금 남은 편지는 한 통뿐이다. 귀국 이후와 한국전쟁 당시 북한 활동 행적으로 보관하던 한 상자 분량의 편지와 자료를 없애야만 했던 지난 정부 시절의 사회적 분위기 탓이었다.

최근 그가 태어난 고향 조카(한창동) 집에서 본 유일한 편지 한 통을 '조선의용대통신' 발간 80주년에 읽으니 남다르다. 달리 마땅히 할 일이 없어 글로나마 남겨 대구경북인이 한지성과 이두산·정호 부자는 물론, 이들이 참여한 잡지를 한 번쯤 되새기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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