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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숙의 옛그림 예찬]심사정(1707~1769) '선유도'

미술사 연구자

종이에 담채, 27.3×4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종이에 담채, 27.3×4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선유(船遊), 곧 뱃놀이는 상당히 고급한 유흥이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뱃놀이의 흥겨움, 유쾌함의 분위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주인공은 뱃전에 의지해 만경창파를 무심히 응시하고, 마주 앉은 주인공의 친구 역시 먼 물결을 망연히 바라 볼 뿐이다. 배는 소용돌이치는 물결 한 가운데 있어 금방이라도 뒤집힐 것 같이 위태로워 보이는데 사공만 온 몸을 기울여 삿대질 하며 풍랑을 헤쳐가고 있다.

이 배는 유람용이 아니라 침실과 서재가 있는 주거용을 그린 것 같다. 당나라 때 범택(泛宅), 부가(浮家)라는 말이 있었다. 물에 띄운 집, 물에 떠 있는 집은 곧 배이다. 영어로는 '하우스보트', 순 우리말로는 '집배'가 된다. 배를 집으로 삼는 주거(舟居)는 한편으로는 자유를 누리는 생활이다. 중국은 북마남선(北馬南船)이라고 하듯 강남은 운하와 수로가 길처럼 연결되어 배로 어디든 갈 수 있다. 일엽편주를 나의 집으로 삼아 떠다니며 인간 세상에서 벗어난 삶을 살고 싶다는 선망이 범택부가라는 말에 담겨있다. '선유도'의 배는 세상에서 자유롭고 싶은 심사정의 심정을, 배를 둘러싼 파도는 세상살이의 세파(世波)를 의미하는 듯하다.

주거(舟居)가 주는 자유와 함께 꼭 필요한 것이 가끔 마주할 친구와 다소의 물건이다. 책상이 있고, 책상 위에는 청색 책갑에 든 책과 꽃이 꽂혀 있는 꽃병, 벼루로 보이는 물건이 있다. 그 옆의 고목 분재(매화가 아닐까)에는 반려 학(鶴)이 한 마리 앉아 있다. 정수리가 붉은 단정학(丹頂鶴)이다. 이 정도면 만족스러운 주거(舟居) 일 것 같다.

심사정은 증조부 심지원이 효종시대에 영의정을 지냈고, 조부의 형 심익현이 효종의 부마로 왕실 외척이었던 명문대가였으나 조부가 역모사건에 가담해 극형에 처해져 집안이 완전히 몰락했다. 평생 동안 그림에만 전념할 수밖에 없었고 생계를 위해서도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50여 년간 우환이 있거나 즐겁거나 하루도 붓을 쥐지 않은 날이 없었다. 몸이 불편해 보기가 딱할 때도 물감을 다루며 궁핍하고 천대받는 쓰라림이나 모욕을 받는 부끄러움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현재거사묘지명」)고 할 정도로 화가의 일생을 살았다.

'선유도'는 심사정이 평생의 화업(畵業) 속에서 이룬 부드러운 먹선의 격조 있는 묘사와 은은한 담채의 무르익은 솜씨를 잘 보여주는 아름답고도 쓸쓸한 그림이다. "갑신신추 사(甲申新秋寫) 현재(玄齋)"로 날짜와 호를 쓰고 앞쪽에는 연주인(聯珠印) '현재'를 찍었고, 말미에는 '심씨(沈氏)', '이숙(頤叔)'으로 성씨와 자를 새긴 인장을 찍었다. 부친 손세기(1903-1983) 선생을 이어 이 그림을 소장했던 손창근(1929년 생) 선생이 2018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명품들 중 한 점이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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