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타임캡슐] 밤깎기

1980년대 가정주부들의 계절부업

밤(栗)의 계절이라 더 눈에 익은 사진이다. 1980년대를 곱씹으면 최루탄과 민주화 시위부터 떠올릴지 모르나 대낮부터 밤을 깎던 주부들의 모습이 선명하다. 밤깎기는 당시 가정주부들의 '유행하는' 부업이었다. 온 동네가 밤을 깎았다. 밤을 수확한 뒤라야 했으므로 계절부업이었다. 큰돈이 되는 건 아니었다.

아이들은 몇 꾸러미씩 되는 밤이 집에 쌓여있으니 신기해했다. 엄마의 날랜 손을 빤히 쳐다보노라면 실한 밤 한 톨이 입에 들어온다. 엄마는 맛있는 걸 입으로 오물거리는 자식을 들여다보며 '부모의 표정'을 지었다.

일상으로 칼을 써 식사를 준비하는 가정주부라고 숙련자였을까. 깎은 만큼 돈을 받는 인센티브제였으니 허리 한 번 펴기 힘들 만큼 바빴다. 아이들은 제 엄마를 돕겠노라며 가정용 과도로 깎아보지만 금세 지쳐 떨어졌다. 껍질을 까다 조막손에 물집이 잡히는 건 삽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엄마가 깎는 모양처럼 예쁘게 깎아내질 못했다. 엄마들에겐 비장의 무기, 골무와 밤깎기 전용 칼이 있었다. 전용 칼은 조각칼 뺨치게 예쁘게 깎였다. 그렇게 정갈하게 깎인 밤들은 일본으로 수출된다고 했다.

사실 밤까기의 고수는 제사를 준비하는 남성들이다. 명절 차례상 밤치기는 유구한 세월 남자들의 일이었으니. 하지만 부업으로 수천 알의 밤을 매일처럼 깎노라면 장손이라도 두 손 들 수밖에 없다.

밤 깎아 받은 돈은 주부들의 비자금으로 사용될 만큼 넉넉하진 못했다. 심지어 깎던 밤 몇 알은 가족들 주려고 빼놓기도 했으니 시쳇말로 '껌값'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돈이 자식들 입에 호빵으로 돌아왔고, 겨울철 가족의 식탁을 풍성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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