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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원의 기록여행] 입시 지옥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박창원(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그동안 개교 준비를 하여오던 대구야간대학은 지난 28일 오후 2시 그 학교의 임시교사인 대구농과대학에서 개교식과 겸하여 제2회 신입학생 입학식을 거행하였는데 식은 장인환 씨의 개식사와 학장 대리 최해청 씨의 인사말씀이 있은 뒤 성황리에 폐식하였다 한다.'(매일신문 전신 남선경제신문 1948년 11월 30일 자)

해방이 되자 교육 균등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나 구분 없이 누구나 공부할 수 있는 교육 기회의 균등을 의미했다. 일부 특권계층의 자녀들만이 누리는 교육 불평등을 타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학교의 문턱을 낮추는 일이 시급했다. 1948년의 경우 지금의 초등학교인 국민학교 졸업자는 19만 명이 넘었다. 하지만 중학교 수용 인원은 고작 7만 명에 불과했다. 진학 희망자를 60%로 잡아도 4만여 명은 학교 문턱을 넘을 수 없었다.

학교 진학의 좁은 문은 대학이라고 다를 바 없었다. 그렇다고 당장 학교의 수용 인원을 늘릴 수 없었다. 교육 당국은 고육지책으로 야간학교 설치를 추진했다. 수만 명의 학생이 늘어나는 효과가 있었다. 대구야간대학이 문을 열었다. 비록 야간이었지만 학교 수용 인원의 확대는 교육 기회의 균등과 맞아떨어졌다. 주경야독하는 학생들에게도 도움이 컸다. 첫머리에 인용한 기사 속의 대구야간대학은 훗날 대구대와 합쳐 영남대가 된 청구대의 전신이다.

상급학교 진학의 좁은 문은 입시 지옥과 맞닿아 있었다. 말하자면 수요와 공급의 격차였다. 해방 직후에는 지금과 달리 가을학기였다. 그러다 보니 7, 8월에 입학시험이 집중되었다. 중등학교 시험을 치르고 나면 대학시험이 이어졌다. 전문학교들은 대부분 대학으로 승격되었다.

대구에서는 대구농대와 대구의대, 대구사대 등이 해당되었다. 대학에서는 국어와 수학, 외국어에다 상식시험을 치렀다. 신체검사 또한 빠지지 않았다.

우리 손으로 치르는 입학시험은 일제강점기 때와는 크게 달랐다. '태극기를 그려 보라'거나 '훈민정음은 누가 언제 만들었느냐'는 중등학교의 문제는 이를 말해준다. 또 대학 입학시험에는 우리말 테스트와 고전문학, 시조와 속담 등이 출제되었다. 학생부 종합의 시초라고 할까. 대학에서는 학업성적이 적힌 출신교장의 내신서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 시절 최고의 인기학과는 법 관련 전공이었다. 의학계통이 뒤를 따랐다.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일부 학부모의 입시 과열은 이미 중학교 시험부터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킬 정도였다. 1950년에 대구에서는 입학시험지를 돈으로 사고파는 사건이 일어났다. 입학시험지 인쇄를 위탁받은 기관의 직원이 문제를 훔쳐 초등학교 교원에게 수십만원을 받고 팔았다. 또 그 교원은 2만원씩을 받고 학부모들에게 되팔았던 것이다.

입시 거래는 아이가 아니라 어른들의 눈높이에서 드러난 입시 지옥의 민낯이었다. 국가적 행사로 자리 잡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이 14일로 코앞에 다가왔다. 속은 그대로인데 포장을 달리한 입시를 해마다 치르고 있다. 올해도 다들 고생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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