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괴롭힘 금지법' 100일 지나도…"갑질 경험" 69.3%

지난달 인크루트에 따르면 직장인 72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한 결과, 69.3%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 된 지 100여 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현장에서는 선배나 상사의 갑질이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용자나 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 또는 관계 우위를 이용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는 등의 행위 등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하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7월 16일) 된 지 100여 일이 지났다. 어느 정도 노사문화가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되지만 아직도 기업은 물론 근로자들의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기업은 '괴롭힘 금지법'에 해당하는 행위의 범위를 두고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고, 근로자들도 괴롭힘을 당했다고 느껴도 대응할 만한 시스템이 정착되지 않아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100일이 지난 현재 직장인들에게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괴롭힘 유형은
지난달 인크루트에 따르면 직장인 72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한 결과, 69.3%가 '최근 직장 갑질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직장 甲질 '여전'

#1. 회사원 김지민(가명·34) 씨는 몇 달 전 육아휴직을 끝내고 회사로 복직했다. 지민 씨는 복귀 의사를 알렸을 때 회사가 탐탁지 않아 하는 걸 느꼈다. 예상한대로 복귀 후에 회사는 한동안 지민 씨에게 아무런 일을 주지 않았다. 마땅한 업무가 없다는 것이었다. 지민 씨는 컴퓨터로 인터넷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며칠 뒤 지민 씨는 회사로부터 업무시간에 다른 일을 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지민 씨가 업무를 달라고 하자 회사는 기다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컴퓨터, 휴대전화, 책 읽기 등을 할 수 없게 된 지민 씨는 결국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업무에서 배제되자 자연스럽게 지민 씨는 회사에서 겉돌게 됐다. 누구도 대놓고 지민 씨를 따돌리지 않았지만 회사에서 오가는 대화는 업무 관련 내용이 많아 지민 씨는 동료들의 대화에 낄 수 없었다. 지민 씨는 한 달 만에 회사를 그만뒀다.

#2. 20대 초반 서지영(가명) 씨는 여행사에 입사했지만 11개월 만에 퇴사했다. 지영 씨는 항공, 호텔, 렌터카 등 예약을 담당하는 부서에서 일했다. 모두 대선배로 연차가 가장 낮은 사람이 3년차였다. 그중 지영 씨에게 친절하게 일을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 지영 씨가 출근 첫날 인사할 때부터 상사는 '예의가 없다'며 트집을 잡았다. 업무에 대해 물어보면 '네가 알아서 찾아'라는 면박만 돌아왔다. 지영 씨는 결국 입사 11개월 만에 우울증, 불안장애, 수면장애 진단을 받고 퇴사를 결심했다. "1개월만 더 버티면 퇴직금이 나온다고 했지만 퇴사했다"고 했다.

대표이사에게 근로자가 괴롭힘을 당한 경우 사표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신고하기가 쉽지 않다.
괴롭힘 유형은 '업무과다'(18.3%)가 제일 많고 이어 '욕설·폭언'(16.7%), '근무시간 외 업무 지시'(15.9%), '행사·회식참여 강요'(12.2%) 등이 뒤를 이었다.

#3. 이상미(가명·31) 씨는 선배의 과도한 '관심'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고 싶을 지경이다. 영업직 특성상 상미 씨는 외근이 잦다. 선배는 상미 씨에게 30분~1시간마다 "어디냐?" "밥은 먹었냐" "누구를 만나고 있느냐"고 묻는다. 상미 씨는 감시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선배가 업무시간에 업무 관련 내용을 묻는 것에 대해 항의할 수는 없었다. 상미 씨가 이를 문제로 인지하게 된 건 동료들에게 털어놓고 나서다. 해당 선배는 상미 씨를 제외한 다른 누구에게도 수시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선배는 출근 전, 퇴근 후, 심지어 휴가 때도 상미 씨에게 안부를 묻거나 밥을 먹자고 제안했다. 상미 씨는 선배의 행동이 과하다고 생각했지만 폭력, 폭언, 성희롱 등 어디에도 해당되지 않아 문제를 제기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일부 동료들은 "선배가 너를 아껴서 그렇다"고 말했다. 상미 씨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정신과를 다니기 시작했다. 스트레스로 인한 피해망상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처럼'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100일이 지났음에 불구하고, 상사의 갑질은 여전한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달 29일 인크루트에 따르면 직장인 72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 한 결과, 69.3%가 '최근 직장 갑질을 경험했다'고 답했다. 지난 7월 16일 법 시행 이후 해당자는 28.7%로 확인됐다. 괴롭힘 유형 1위는 '업무과다'(18.3%)였다. '욕설·폭언'(16.7%), '근무시간 외 업무 지시'(15.9%), '행사·회식참여 강요'(12.2%), '사적용무·집안일 지시'(8.6%), '따돌림'(6.9%), '업무배제'(6.2%), '성희롱·신체접촉'(5.4%), '기타'(4.2%) 등이 뒤를 이었다. 서미영 인크루트 대표는 "직장인이 바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괴롭힘 금지법이 필요 없는 직장일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직장 갑질 문제에 대해 법의 사각지대를 줄이면서도 사내외 교육을 통한 문화를 바꾸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대표이사에게 근로자가 괴롭힘을 당한 경우 사표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신고하기가 쉽지 않다.

◆대표가 가해자인 경우 신고 어려워

직장 내 괴롭힘 제보 사례 중 최고책임자(대표이사) 가해자인 사례가 많이 접수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사내에서 문제를 제기할 만한 통로가 차단돼 있는 실정이다. 문제를 공식화한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대표이사가 고용에 대한 결정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피해자들은 일터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서라도 장기간 괴롭힘을 참고 버텨야 하는 경우가 아직 비일비재하다. 표면적으로는 기존의 괴롭힘을 자중하더라도 신고자를 찾아내려고 하거나 업무를 빙자하거나 직위를 이용해 필요 이상의 요구를 하는 등 직원들을 압박하고 있다.

한 직장인은 "사장이 직위를 이용해 전직원에게 여러가지 방법과 이유로 갑질을 해왔다"며 "신고하면 사장이 신고자를 찾아내려고 하면서 직원들을 압박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노무법인 혜윰 박우용 대표 노무사는 대표이사에게 근로자가 괴롭힘을 당하는 경우 이를 제재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현행 근로기준법에선 회사 내에서 괴롭힘이 발생하면 회사가 마련한 취업규칙에 따라 '사내에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최고 결정권자인 대표이사가 직원을 괴롭힌다면 가해자인 사용주가 스스로를 제재해야 하는 모순이 생긴다"며 "피해자는 고용노동청에 진정을 제기할 수 있지만 사용주가 조사 과정에서 출석에 응하지 않으면 이에 대해 법적 제재를 하기 사실상 어렵다"고 말했다.

박 노무사는 이어 "많은 기업이 사내고충처리시스템을 갖추고 있고 운영하고 있지만, 소규모 사업장의 경우 대표이사가 정권을 쥐고 있는 경우가 많아 그와 같은 환경을 갖추기 어렵다"면서 "소규모 사업장이나 대표이사에게 괴롭힘을 당한 경우는 고용노동부가 직접 판단하고 조치를 내려주도록 보완하는 것이 한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직장 갑질 문제에 대해 법의 사각지대를 줄이면서도 사내외 교육을 통한 문화를 바꾸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인사관리자, "직원들과 소통 어려워"

기업 인사관리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요즘은 직원들과 소통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했다. 한 인사 관리자는 "상급자와 하급자 사이에, 직장 동료들 사이에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갈등 문제들을 법적인 제도를 통해 해결할 수 있게 되다 보니, 녹음, 녹취 등은 이제 놀랄 일도 아니다. 이메일, SNS메시지 등을 통한 업무지시는 딱 필요한 수준에 그쳐야 하고, 개인적인 소통을 자제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또 "더 이상 직장 내에서는 인간적인 관계 맺음에 소극적이게 되고, 법을 위반하지 않으려는 방어적 대인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관계를 통해 해결해야 할 사항도 문제 발생 시 직장 내 괴롭힘 신고나 노동청 진정, 인권위원회 진정 등을 통해 해결하려고 한다"면서 "이러한 상황이라면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직장 문화를 만들기 위해 도입된 제도의 취지가 무색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사용자는 회사의 업무상 필요에 따라 합리적 범위에서 인사명령을 내릴 수 있고, 이는 사용자의 재량권에 속하는데 법 시행 이후 어렵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근로자는 회사의 인사명령이 부당하다고 여길 경우 노동위원회에 구제신청을 제기하거나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면서 "그러나 근로자가 조직 내에서 적응을 잘 하지 못하거나 인화를 해치는 경우, 업무능력이 떨어져 해당 부서의 생산성 향상에 기여하지 못하는 경우 회사는 그 근로자에 대해 인사명령을 내릴 수 있지만, 그 자체가 직장 내 괴롭힘이 될 여지가 있어 어렵다"고 하소연했다.

◆그럼에도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교육 필요

전문가들은 직장 갑질 양극화 문제에 대해 법의 사각지대를 줄이면서도 사내외 교육을 통한 문화를 바꾸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한다. 박우용 노무사는 "현행 괴롭힘 금지법은 노조가 없는 경우 직장 내 괴롭힘 문제를 사장한테 신고해야 하는 점, 근로기준법에 따라 5인 미만 사업장에는 적용되지 않는 점 등은 개선돼야 한다"면서 정부 감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박 노무사는 이어 "문제가 될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히 인식할 수 있도록 사내외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며 "갑질을 당한 직원들이 불만을 자연스럽게 표출하는 방식도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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