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영양산촌생활박물관이 영양군 수비면 신원리 하천변에서 갈암 이현일의 문집에서만 전해져 오던 '계정'(谿亭)의 석각(石刻)을 발견, 1694년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의 여파로 촉발된 '갑술환국' 이후 잊혀졌던 중요한 유적지를 되찾게 됐다.
영양산촌생활박물관 이영재 학예연구사는 "경북 영양군 수비면 신원리 241전의 하천변에서 조선 중기 영남학파의 거두인 갈암이 건립해 벗들과 소요하며 '요산유수'(樂山樂水)의 삶을 실현했던 정자인 '계정'의 석각을 발견했다"고 14일 밝혔다.
갈암 이현일(李玄逸·1627~1704)은 영산서원(英山書院)의 원장을 역임한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1590~1674)과 최초의 한글 요리책인 '음식디미방'을 저술한 여중군자 장계향(張桂香·1598~1680)의 둘째 아들이다.
갈암은 1653년 부모가 보다 깊은 산속으로 은거(隱居)를 선택하자 부모님을 모시기 위해서 영양군 수비면 신원리로 이주해 '수산유허비'(首山遺墟碑) 부근에 '갈암'(葛庵)이라는 집을 짓고 19년 동안 거주했다.

특히, 갈암이 지은 '계정기'(谿亭記)에는 '어느날 아버지를 모시고 동쪽에서 흘러 들어오는 신원천(新院川) 가를 걷다가 기이한 바위와 맑은 물소리가 어우러진 명승지를 발견, 그곳에 '계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이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 바위에 두 글자를 석각했다'고 기록돼 있다.
기문과 문집에 의하면 갈암을 비롯하여 석계 일가는 '계정'에서 밤낮으로 학문을 닦으며 여가를 즐겼다고 함으로 이 정자는 조선 중기 선비들의 이상적인 삶이었던 '요산요수(樂山樂水)'의 삶을 현실에서 구현한 곳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계정'에서 학문을 닦은 석계의 아들들이 모두 당대 학문으로 일가를 이루었으며, 갈암의 경우 조정에 출사해 이조판서에 으르는 등 1672년 석계 일가가 수비를 떠난 뒤에도 그들의 유거지와 정자는 당대 유학자들 사이에서 방문하고 싶은 지역의 명소였다.
하지만, 1694년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에 인해서 시작된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인해 남인계가 몰락하자 갈암이 탄핵 유배의 길에 오르면서 잊혀진 장소가 됐다.
수백 년간 잊혀졌던 이 '계정'은 지난 5월부터 영양군 문화시설사업소에서 추진하고 있는 '수산유거지 복원사업'의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이 연구사가 '수산유거지'에서 동쪽으로 약 950m 떨어진 바위에서 석각을 발견함으로써 다시 세상에 드러나게 됐다.
오도창 영양군수는 "수백 년간 잊혀졌던 갈암 선생의 정자를 다시 찾게 된 것은 지역사의 발굴과 유거지 복원사업에 있어서 모두 대단한 중요한 성과로 이를 바탕으로 보다 실증적으로 복원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지표가 설정된 것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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