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많이 내리던 어느 밤, 나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비가 내리면 으레 그렇듯이 버스 안은 우산에서 떨어진 빗물 때문에 바닥이 미끄러워진다. 꽤 늦은 시간이라 사람이 많이 없어 다행히 빈자리는 많았다. 나의 운동신경을 너무 믿다가 빗물을 엉덩이로 방아 찧었던 기억이 있어 조심스럽게 손잡이에 의지해 빈자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근데 왜 항상 버스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 마냥 빨리 출발할까? 비틀거리며 용케 자리에 앉아 내 종아리 근육을 긴장하게 만든 버스기사님 뒤통수를 향해 레이저를 쐈다. '그래, 배차시간을 맞추려면 어쩔 수 없으시겠지' 라며 마음을 추스르고 있을 때 한 어르신이 버스에 올랐다. 그 어르신은 조금 낡아 보이지만 주름이 잘 잡혀있는 정장을 입고 중절모를 쓰고 계셨다. 버스 요금을 내시더니 중절모를 살짝 들어 올리시며 버스기사님께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를 건네셨다. 순간 버스 안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 어르신께 집중되었고 다음은 당황하시는 버스기사님으로 옮겨갔다. 버스를 타며 기사님께 인사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어쩔 줄 몰라 하시는 기사님 때문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그 인사덕분인지 당황하느라 배차시간을 잊으신 건지 그 어르신이 느린 걸음으로 자리에 앉을 때까지 버스의 가속페달을 밟지 않으셨다.
우리는 인사에 야박하다. 고개를 숙여 '안녕하세요' 라고 상대방의 안녕을 문안하는 것이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먼저 해야 된다는 고정관념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부하직원이 상사에게, 후배가 선배에게, 어린 사람이 연장자에게. 하지만 문법상 문장 종류를 따지자면 '~하세요' 라고 끝나는 문장은 명령형이다. 어쩌면 인사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먼저 하는 말일 수도 있겠다는 재미있는 억측을 해본다. '안녕하세요' 라는 말은 '걱정과 아무 탈 없이 몸과 마음이 편안하시라' 는 뜻이다. 우리가 무심코 건네던 인사말이 이렇게 좋은 뜻을 가지고 있다니 이보다 좋은 명령이 있을까?
대학생 시절 며칠 밤을 새우고 피곤의 극치에서 신발을 끌며 지하철을 타기 위해 역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같은 과에 여자 친구가 우연히 나를 발견하고 밝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다. '오빠' 라고 꽤 길고 큰소리로 불렀는데, 글자로 표현하자면 '빠' 자가 50자 정도는 더 있어야 할 것 같다. '순간 우리가 이렇게 친한 사이였나?' 의심이 들다가 그 친구의 밝은 표정을 보니 나도 모르게 미소가 번졌다. 피로와 스트레스가 그 인사 한 번에 사라졌다.
반갑게 건네는 인사 한마디는 힘을 가지고 있다. 웃음을 전염시키고 버스 출발을 늦추고 깊은 유대관계가 아니었단 친구의 이름을 기억하게 만든다. (유경아, 잘 지내고 있니?) 대우받기 위해 인사를 기다리기보다 먼저 눈을 마주하고 건네는 인사 한마디가 당신의 가치를 더 높일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김현규 극단 헛짓 대표,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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