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사랑이라는 밥의 은유

임창아 시인·아동문학가

임창아 시인, 아동문학가
임창아 시인, 아동문학가

명분을 가로질러 밥이 왔다. 천국에서 추방된 밥이, 추풍낙엽에도 나를 생각하며 왔다. 국도를 지나는 적막한 빈들, 서로를 간섭하며, 가끔씩 눈을 깜박거리며 왔다. 이렇게 왔는데 나는 밥이 보고 싶지 않았다. 밥상을 차리고 싶지도, 숟가락을 들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입을 벌리고 싶지 않았다. 목구멍이 허락하지 않았다. 스물두 살 여학생이 털어놓은 말 감기처럼 목구멍에 걸려있었다.

밥의 얼굴은 다양하다. '밥블레스 유',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화끈한 화법의 김수미와 충청도식 유머가 빛나는 '밥은 먹고 다니냐' 등의 TV프로그램들을 보면 빵이나 고기에 밀려나도 밥에 대한 사랑은 한결같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의 촌장님에게 물었다. 마을 사람들을 잘 다스리는 영도력의 비밀이 무엇이냐고? "잘 멕여야지." 결코 쉽지 않는 말인데 아주 쉬운 말로 들렸다.

밥! 누군가에게는 슬픔이고 누군가에게는 배고픔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고개를 수그려야 입으로 들어가는, 밥 먹듯 부르는 말, 한 번쯤 건너뛰어도 되는데 밥풀처럼 악착같이 달라붙는 밥, 새벽에 일어나 밥솥을 열어 본다. 새하얀 밥알들이 식구처럼 꼭 껴안고 있다. 끓고 있는 밥솥만큼 뜨거운 언제 적 촛불인지 알 수 없으나 어머니는 여전히 시에서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비가 오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날도 어두워지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 암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손톱이 빠지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촛불로 밥을 지으신다' 정재학 시인의 시 일부를 가지고 오는 동안, '담벼락의 비가 마르기 시작'하는데 어머니는 천국에서도 촛불로 밥을 지으실까?

생활과 한 몸인 밥처럼 툭 하면 '너 밥 없을 줄 알아!' 이런 협박이 통하지 않는 시대임을 알면서도, 여전히 협박으로 사용하는 걸 보면 엄마들에게 '밥'은 큰 무기이자 사랑임에 틀림없다. '밥은 먹고 지내냐', '밥맛 떨어진다', '밥값은 해야지', '그게 밥 먹여 주냐?' 얼마나 정이 떨어지면 '밥맛 떨어진다'고 했을까? 밥 먹고 사는 것이 삶이라면 죽음은 영영 밥숟가락 놓는 것이고, 취직은 밥 먹을 자리 찾는 것이고, 실직은 밥줄 끊어지는 것이다. 일 잘하는 사람은 밥값 톡톡히 하는 사람이며, 일 못하는 사람은 밥값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다.

밥 먹다가 싸우고, 밥 먹다가 정들고, 밥 먹다가 울고, 그래 놓고 또 밥 먹자, 밥은 먹었냐, 밥 챙겨 먹어라, 밥의 무한함은 결국 사랑의 무한이자 은유다. 임창아 시인,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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