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책]기울지 않는 길/장재선 지음/서정시학 펴냄

장재선 시인. 김구철ⓒ
장재선 시인. 김구철ⓒ

시인 장재선이 시집 '기울지 않는 길'을 펴냈다. 1부는 한국인이면 알만한 사람들의 인생 한 순간을 포착하고, 그것을 소재로 시인의 성찰을 그려낸다. 2부는 고향과 어머니, 아버지, 가족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다. 3부는 국내외 여행지와 거리에서 마주친 풍경에서 떠오른 느낌을 시로 형상화한 것이다. 4부와 5부는 살면서 만나기 마련인 상념을 시인 특유의 두터운 사유와 예민함으로 그려낸 작품들이다.

배우 나문희씨가 큰 상을 받은 모양이다. 시상식 장면은 시인 장재선을 통과하며 거듭난다.

'고모할머니 나혜석이/ 한 세기 전에 길을 열어놨기에/ 그녀도 그 길을 걸어/ 칠십육세에 도달한 배우로/ 당당히 월계관을 쓴 채 말했다.// "지금 아흔여덟이신 친정어머니와/ 그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나의 부처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나의 친구 할머니들, 제가 이렇게 상 받았어요/ 여러분도 다들 그 자리에서/ 상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녀 덕분에/ 졸지에 악수를 하게 된/ 부처님과 하나님이/ 쌍으로 축원하는 게 들렸다./ "나무아미타부, 아멘!" -수상 소감 덕분에-(배우 나문희)

기울지 않는 길
기울지 않는 길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신여성 작가였던 나혜석은 영화배우 나문희씨의 고모할머니다. 나혜석이 활동했던 당시, 여성의 사회활동과 자기목소리 내기는 '방종'으로 비쳐졌고, 비난 받았다. 배우 나문희는 세상의 축하 속에 상을 받으며, 상은커녕 온갖 욕을 먹었던 할머니 나혜석에게 감사를 표했고, 친하지 않은 두 종교가 화음하도록 했다.

문학평론가 유성호 한양대 교수는 "장재선 시인은 존재가 가질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슬픔에 자신의 언어적 초점을 둔다. 그럼에도 우울한 비판주의자나 과거 지향의 회고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삶의 본원적인 슬픔을 궁극적으로 긍정하며 내적 계기들을 풍부하게 만들어 낸다."고 말한다.

'(상략)아홉 살 때 짐바리로 아버지에게/ 처음 배웠던 자전거./ 읍내 중학교로 통학할 때/ 뒤에 도시락 가방 매달아주고/ 교복 안주머니에 땅콩 한 줌 넣어주시던/ 그 어머니는 계시지 않는데,// 자전거의 봄은 또 왔다.' -자전거의 봄- 중에서.

어른이 된 시인은 자전거를 탄다. 통학을 위해서가 아니라 춘천이나 속초로 여행 삼아 다닌다. 어느 해 봄, 겨우내 실내에서 타던 자전거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훅! 폐부로 파고드는 봄바람에서 시인은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쳐 주던 아버지, 등굣길에 오른 아들의 교복 안주머니에 땅콩 한 줌 넣어주시던 어머니를 생각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게는 자전거가 있고, 그때나 지금이나 봄은 왔는데, 어머니는 없다.

장재선의 시는 어렵지 않다. 그는 언어를 비틀거나 꼬지 않는다. 그냥 평면이다. 그러나 독자는 그 빤한 평면 속에서 굽이굽이 이어진 시인의 지난날에 대한 상념과 오늘의 그리움을 본다.

아래 시 '시집을 읽으며 아이의 잠과 싸우다'는 장재선이 이번 시집에 어떤 작품을 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이가 학교에 가지 않는 토요일, 아침 아홉시 반에 깨워 달라는 아이를 열시 반에 깨웠다. 영어 공부를 하다가 새벽에 잠이 든 아이가 더 잤으면 해서였다. 아이는 비비적거리며 일어나 수학 문제집을 펼치더니 이내 고개를 꺾고 있다. (중략) 녀석이 나가 달라고 했으나 나는 아이 책상 옆 의자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중략) 고영민 시집 「공손한 손」을 손에 들고 아버지랑 과수원에서 농약 치던 대목을 읽다가 거실로 나가 사과를 깎았다. 사과를 좋아하는 녀석인데 빈속에 먹기 싫다며 고개를 저었다. (중략) 시집 한권을 다 읽는 동안 아이는 깨어있는 듯 했는데 어느새 침대에 쓰러져 있다. "이렇게 자도 되는 거야." (중략) 그렇게 말하면서도 이불을 가져다가 덮어 줬다.' -시집을 읽으며 아이의 잠과 싸우다'- 중에서.

잠과 싸우며 공부하는 어린 자식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아버지의 심정이 오롯이 묻어난다. 장재선 시인은 부모님, 고향, 자식, 여행지 등 살면서 만났거나 마주했던 것들을 시적 소재로, 한세상살이를 아련하게 바라본다. 시인은 사랑하고, 이별하고, 그러고도 살아가야하는 존재의 운명을 슬퍼하며 긍정한다.

126쪽, 1만2천원.

▷ 장재선

전북 김제 출생. 고려대 정외과,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졸업. '시문학'에 작품 발표하며 시작 활동. 시집 'am7이 만난 사랑의 시' '시로 만난 별' 산문집 '영화로 만난 세상' 등을 펴냈다. 한국 가톨릭 매스컴상(2004), 서정주 문학상(2017)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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