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약속이 있어 바쁘게 발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멀리 어수룩한 차림을 한 할머니가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늘 같은 자리에서 집에 갈 차비가 없다며 차비를 빌리시던 어떤 할머니에게 차비로 쓰이지 않을 걸 알면서 지갑을 열었던 경우가 꽤 있었던지라, '이번에도 차비를 달라시면 어쩌나' 하고 불안함이 몰려왔다. 아니나 다를까 할머니는 끝내 내 앞에서 말을 걸었다. "집 좀 찾아주세요." 추위가 잔뜩 묻은 입술을 하고서 목에 걸려있는 동그란 목걸이를 내미신다. 목걸이 앞면에는 아들 내외 것으로 보이는 전화번호 두 개와 뒷면에는 주소가 새겨져 있었다. 손자뻘쯤 되는 나에게 자신의 허물을 보이시는 할머니의 마음이 어떨까 생각해보니 오해했던 내가 한없이 초라해졌다. 할머니를 꼭 도와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여기 전화해드릴게요" 라고 말하며 전화기를 꺼내는데 할머니가 내 손에 있던 목걸이를 '탁' 움켜쥐시며 전화는 하지 말고 어디로 가는지 길만 알려달라고 하신다. 자식에게 조금이라도 짐이 되고 싶지 않으셨던 할머니의 마음을 알아채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당황한 기색을 감추고 얼른 스마트폰에서 주소 검색을 했다. 거리는 약 300미터 정도, 그리 어려운길은 아니었다. "할머니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여기서 많이 안 멀어요." 몇 차례 사양하시더니 이내 나와 함께 발을 옮기셨다. 대로변에서 골목길로 들어가 한참을 말없이 걸었다.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설픈 위로도 어색함을 달래는 물음표 없는 질문도 하고 싶지 않았다. 골목 끝에 모퉁이를 돌자 할머니가 여기서부터는 혼자 갈 수 있다고 하신다. 불안했던 나는 그래도 집 앞까지 모셔다드리겠다고 하자 버럭 화를 내셨다. '아, 길을 잃었다는 것을 자식에게 들키고 싶지 않으신 거로구나' 하고 번뜩 생각이 들어 얼른 나머지 길을 알려드렸다.
자식과 부모는 도대체 어떤 관계일까? 자식은 부모를 선택할 수 없고 부모도 자식을 선택할 수 없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덜컹 맺어진 인연으로 서로 남보다 못하게 싸우기도 하고 남이라면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누구나 한 번쯤 '나는 왜 하필 이런 부모 밑에서 태어났을까' 하는 원망을 해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만의 경험이 아니길…) 좀 더 돈 많은 부모, 좀 더 다정한 부모, 좀 더 지적인 부모…. 하지만 거꾸로 부모가 자식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선택받을 수 있을까? 하는 부끄러움이 생긴다.
매번 다녔던 길이 낯설게 느껴지는 두려움보다 자식에게 짐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더 컸던 부모의 마음이 조금 이해가 된다면 부모가 길을 잃을까봐 목걸이에 주소와 전화번호를 새겨 부모의 목에 걸어준 자식의 마음도 이해가 되지 않을까? 부모 자식 간에 자격이 필요하다면 세상에 누가 부모와 자식을 할 수 있을까? 김현규 극단 헛짓 대표,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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