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살에 소리 공부를 시작했으니, 벌써 육십여 년을 우리 음악과 함께 산 셈이다. 철부지 코흘리개 소녀가, 대구극장에서 명창 소리를 들으면서 시작한 나의 국악 인생도 이제는 황혼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하고 싶은 일도 많고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아 있는데…."
1921년 경북 칠곡에서 태어나 대구에서 국악 공연을 보며 우리 음악 세계에 첫발을 들여놓았고, 가야금 병창 인간문화재로 살다 1993년 73세로 삶을 마치기 전인 1992년, 60년 국악 인생을 돌아본 박귀희 명창이 자서전 '순풍에 돛달아라 갈길 바빠 돌아간다'에 남긴 회고담이다.
박귀희는 뒷날 대구에서 대학 3년 과정을 수료하기도 했을 만큼 대구에 국악 인생의 흔적을 남겼다. 물론 국악인의 대구 인연은 숱하다. 조선 8도에서 가장 넓은 경상도 중심으로, 감영이 자리하고 관찰사(감사)가 머문 데다 국악에 밝은 '귀명창'도 많은 곳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특히 대구 국악은 이름난 예기(藝妓)를 통해 맥을 이어갔다. 기생조합과 달성권번(뒷날 대동권번)은 이들 양성소였다. 이들은 국악 공연은 물론, 국권을 되찾는 항일 항쟁과 교육 투자 등에 나선 의기(義妓) 활동도 이어갔다. 염농산 자매를 비롯해 김울산, 정칠성, 현계옥, 김연수 등은 바로 그런 인물이다.
무엇보다 대구의 국악은 오랜 역사와도 맥이 닿아 있다. 대구를 둘러싼 경북은 신라 만파식적의 대금과 옛 가야의 가야금을 낸 땅이었다. 숱한 국악기 가운데 탄생 출처가 분명한 대금과 가야금의 발상지가 경북이다. 그런 경북의 중심이 대구였으니 대구경북은 국악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고을이다.
이런 대구가 지난 2017년 11월 유네스코 음악창의도시 네트워크 가입 이후 음악을 화두로 '일'을 벌이고 있다. 음악회를 열고, 정책을 개발하고, 지난 22일엔 '유네스코 음악창의도시 대구포럼'도 개최했다. 정치·경제 등에서 활력을 잃은 대구 모습을 음악으로 바꾸는 일, 생각만 해도 반갑고 설렐 만하다.
이왕이면 대구의 풍부한 국악 자산과 오랜 역사를 활용하자. 국립국악원 같은 전문기관의 유치도 좋다. 대구만의 국악 시설이라도 갖춰 동서의 음악이 물처럼 고루, 새의 두 날개처럼 짝이 되어 흐르는 음악창의도시로 거듭나면 좋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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