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기업은 이류, 행정은 삼류인데, 정치는 사류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24년 전인 1995년 4월, 국내 언론사 베이징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폭탄 발언을 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건드릴 수 없었던 한국 사회의 치부를 그대로 진단해 등급을 매겨버린 것이다. 이 회장이 정조준한 곳은 바로 정치권이었다. 당시 정치권은 "건방지다"며 발끈했지만 "속 시원하다"는 여론에 밀려 속만 부글부글 끓였다.
세월은 흘렀지만 "이 회장의 분류법이 이제는 틀렸다"고 손들고 나오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강산이 두 번 넘게 바뀌었지만 정치가 사류에 머물러 있다는 솔직한 평가만은 지속되고 있다.
'정치 사류 이론'의 정점에 바로 청와대가 있다. 여당이 청와대만 바라보며 좇아가는 한국 정치의 독특한 특징은 청와대가 변하지 않고는 국회도 바뀔 수 없다는 법칙을 만들어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임명 과정에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보여줬던 모습은 아직도 이 법칙이 한국 현실 정치에서 유효함을 여실히 드러냈다.
"저 스스로를 용서하기 어렵고 서글픈 마음까지 들어 밤잠을 이루기도 힘이 듭니다. 무엇으로도 국민들의 마음을 달래드리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면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이런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기만 합니다." 2016년 11월 4일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2차 대국민 사과문 내용 중 일부다. 최서원 씨와 관련해 그에 대해 경계의 담장을 낮췄던 부분을 뒤늦게 후회하는 박 전 대통령의 발언은 "내가 이러려고…했나"라는 유행어까지 남겼다.
문재인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이 측근으로 인해 참혹한 결과를 맞이한 것을 보면서 '내가 이러려고…대통령'이 되지 않겠다는 다짐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했을 것이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높은 도덕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덕적 가치를 높게, 존중하는 그런 DNA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정부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적폐 청산이고, 그 중심에는 부정부패의 청산, 이것이 놓여 있는데 우리 스스로가 도덕적이지 못하다면 국정 과업을 제대로 해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습니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거둔 직후 문 대통령이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꺼내 놓은 말이다.
문 대통령의 발언에서 드러나듯 문재인 정부 청와대는 '도덕적이고 깨끗한 청와대'임을 구호처럼 내걸고 대놓고 자랑하며 '일류'를 자처했다. 대한민국의 정의와 도덕을 문재인 정부가 모두 소유하고 있는 듯 '정의 독점 시대'를 선언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조 전 장관 사태, 김기현 전 울산시장에 대한 '하명 수사' 의혹, 구속된 유재수 전 부산시 부시장에 대한 '감찰 무마' 의혹까지, 전혀 도덕적이지 않고, 정의롭지도 못한 '시리즈물'을 국민들은 지금 보고 있다. 청와대 민정비서관실에 근무했던 검찰 수사관의 사망 소식은 "뭔가 큰일이 났구나"라는 국민적 의구심도 만들었다.
의혹을 둘러싸고 문 대통령 측근들 이름까지 잇따라 호명되는 중이다. 비리가 적발됐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감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다가 최근에야 검찰에 구속된 유 전 부시장은 문 대통령을 '재인이 형'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국민들은 또다시 대통령 측근이 등장하는 '사류 정치'를 목격 중이다. 도덕으로 무장하고 정의를 독점한 것처럼 보이던 문재인 정부 청와대는 일류 흉내를 냈을 뿐, 그 실체는 사류였다는 비판도 쏟아지고 있다. 가짜는 진짜가 될 수 없다. 일류 흉내가 오래갈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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