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신병주교수의 역사와의 대화] 병자호란과 최명길의 선택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 최명길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추웠던 겨울은 언제일까? 373년 전인 1636년 12월 15일부터 47일간 지속된 남한산성의 겨울이었을 것이다. 남한산성의 겨울은 강추위는 물론이고 온 국토와 백성이 철저히 유린되었다는 점에서 최악의 겨울로 기억된다. 12월 9일 압록강을 넘은 지 6일 만에 청나라군은 한양에 입성하였고, 인조는 강화도 피난길마저 끊기자 제2의 피난처인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전 국토가 청나라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수많은 백성들이 희생당하는 현실 속에서도 인조를 비롯한 남한산성의 수뇌부는 여전히 척화(斥和)를 외치고 있었다. 무력에 의한 멸망이 가시화되었을 무렵, 그래도 현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주화(主和)를 주장한 관료가 있었다. 최명길(崔鳴吉·1586~1647)이었다. 최악의 위기 상황 속에 현실적인 타개책을 찾았던 최명길의 선택은 인조는 물론이고 조선을 살리는 길이었다.

최명길의 실리적인 선택에는 당시 주류인 주자성리학에만 매몰되지 않고, 지행합일을 강조하는 양명학 사상을 접했기 때문이라는 견해도 많다. 전세가 계속 불리해지자 인조는 마침내 최명길에게 항복을 청하는 국서의 작성을 명했다. 최명길의 국서를 본 김상헌은 그 자리에서 이런 치욕을 당할 수 없다면서 국서를 찢어버리며 통곡했다. 최명길은 "대감이 찢었으니 우리들은 마땅히 주워야 한다"며 답서를 다시 썼다.

주화와 척화라는 다른 신념을 가진 두 사람의 대립은 2017년 영화 남한산성에서 영상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삼전도(三田渡·현재의 서울 석촌호수 부근)에 마련되어 있던 수항단으로 내려가 청나라 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림)라는 치욕적인 항복 의식을 하였다. 그리고 정축화약(丁丑和約)이 맺어졌다. 청과 조선과의 사이에 군신 관계를 맺고 명나라 연호 대신 청나라 연호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 두 왕자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낼 것 등이 화약의 주요 내용이었다. 하나같이 굴욕적인 조항들이었다.

삼전도 굴욕 후인 1637년 4월 사신으로 청나라 심양에 간 최명길은 이들의 징병 요청을 거절하고 조선인 포로 수천 명을 속환(贖還)하는 데도 기여하는 등 전후 수습책 마련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642년 8월 영의정으로 있을 때 명나라와 연락을 도모한 일이 발각되어 청나라로 압송돼 심양의 북관(北館)에 억류되었다. 1643년 4월에는 남관(南館)으로 옮겨졌는데 이곳에서 이미 심양에 잡혀와 있던 김상헌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최명길과 김상헌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국 땅 감옥에서 만났다. 남한산성에서는 주화와 척화를 놓고 대립했지만 심양의 감옥에서는 시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이해했다고 한다. 1644년 명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킨 청나라는 조선과 명나라의 연결고리가 확실히 사라지자 1645년 2월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귀국을 허락하였고 최명길도 이때 귀국했다.

1647년 62세를 일기로 사망한 최명길의 졸기(卒記)에는 "추숭(追崇·인조의 아버지 원종 추숭)과 화의론(和議論)을 힘써 주장함으로써 청의(淸議)에 버림을 받았다. 남한산성의 변란 때는 척화를 주장한 대신을 협박해 보냄으로써 사감(私感)을 풀었다"고 그의 주화론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위급한 경우를 만나면 앞장서서 피하지 않았고 일에 임하면 칼로 쪼개듯 분명히 처리하여 미칠 사람이 없었으니 역시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이라 하겠다"고 적어 '한 시대를 구제한 재상'으로 높이 평가한 부분도 있다.

흔히들 난세에 영웅이 등장한다고 한다. 병자호란이라는 최대의 국난을 맞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국가와 민생의 안정에 헌신했던 최명길. 위기의 시기, 이념과 명분보다는 국익과 실리를 찾았던 그의 모습은 현재에도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