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월의 흔적] 빙∼둘러앉아 군고구마 '호호'…화로

화로
화로

옛이야기 한 토막을 풀어놓는다. 겨울바람이 쌩~쌩 불던 어느 날 고모 댁에 갔었다. 얼마 남지 않은 화롯불을 아낌없이 활짝 헤쳐 주셨다. 한숨을 돌리고 나자 화롯전에 얹어놓은 군고구마를 손에 쥐어주면서 "추울 터인데 어한이나 하라"며 다독여 주셨다. 어린 나를 화롯불처럼 따뜻하게 보살펴 주던 인정 많은 분이었는데, 오래전 고인이 되셨다. 하지만 그 훈기는 지금도 내 마음속에 살아 있다.

지금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지만, 우리네 세간 가운데 화로라는 게 있었다. 숯불을 담아 놓고 평상시에는 음식을 데우거나 끓이는 용도로 사용하였다. 또한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 사용하는 불씨를 보관하던 용도로 이용하였다. 그리고 옷을 지을 때 마무리에 쓰이는 인두를 꽂아 사용하였다. 그런가 하면 불씨가 집안의 재운을 좌우한다고 믿어서, 불씨가 담긴 화로를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대대로 물려주기도 하였다.

화로는 상하 계층이나 빈부의 차이 없이 두루 쓰이던 살림살이 가운데 하나였다. 오지․무쇠․놋쇠․곱돌 따위로 만드는데, 형태 또한 여러 가지가 있다. 차를 달이는 것, 보온을 위한 것, 난방을 위한 것, 불씨를 보존하는 것, 여행할 때 가마 안에서 쓰던 수로(手爐) 따위로 나눌 수 있으나 몇 가지 구실을 함께 하는 것이 보통이다. 또한 불고무래․부등가리․삼발이․불돌․부삽․부젓가락 같은 보조기구를 갖춰야 제구실을 할 수 있다. 그리고 화로에 담는 숯불은 저녁나절 아궁이에 군불을 지필 때 준비하였다.

그 가운데 농가에서 주로 쓰던 질화로는 자배기를 닮아서 둥글넓적하고, 아가리가 쩍 벌어졌으며, 좌우 양쪽에 손잡이가 있으나 받침은 달리지 않았다. 이에 비하여 무쇠화로는 질화로와 형태가 비슷하나 손잡이가 밖으로 돌출되고 바닥에 발이 셋 달렸다. 그리고 상류층에서 많이 쓰던 놋쇠화로는 너른 전이 달리고, 다리의 윗부분은 개다리처럼 앞으로 조금 돌출된 게 특징이다. 또한 돌화로는 네모꼴을 이루며 둥근 쇠를 좌우 양쪽에 꿰어서 손잡이로 삼았다.

화로가 만들어 주는 생활 속 풍정 한 장면. 사람에 따라서 조금씩 다르지만, 화롯전에 앉으면 으레 부젓가락에 손이 가기 마련이다. 그 가운데서 불을 달달 볶아서 지레 죽여 버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넓적한 불손으로 재를 모아 맵시 있게 불을 묻어주는 무던한 사람이 있고, 온종일 화롯가에 앉아서 팔짱을 끼고 몸을 좌우로 점잖게 저으며 벽만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더러는 담배꽁초를 차례차례로 화롯전에 늘어놓는 사람도 있다. 은연중에 제 버릇을 드러내는 셈인데, 그 사람의 성품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화롯가에 바짝 붙어 앉았다가 어지러워 쩔쩔매는 경우가 있다. 불기운에 취해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럴 때는 시원한 김칫국물에 냉수를 타거나 동치미 국물을 한 사발 마시면 단숨에 후련해진다. 그런가 하면 상류 가정에서 주인이 아랫목에 앉아 손님을 맞을 때는 화로를 손님 가까이 옮겨주는 것을 예의로 삼았다. 민서들도 화로를 연장자나 손님 곁으로 밀어주면서 정을 나누었다. 사람살이에 훈기가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김 종 욱 문화사랑방 허허재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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