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아리랑 고개는 아무나 넘어가나

조향래 논설위원
조향래 논설위원

어린아이와 부녀자까지 함께한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향하는 망명길은 혹독한 여정이었다. 난생 처음 접하는 북방의 겨울바람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모진 추위와 허기에 시달리며 황량한 만주벌판을 걷고 또 걸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시린 것은 나라 잃은 서러움이었다. 우리 민족 사상 유례없는 험난한 아리랑 고개였다. 기약 없는 아리랑 고개였다.

110년 전 경술국치를 당하자 안동 명문가의 주손인 백하 김대락과 석주 이상룡은 66세와 53세의 노구를 이끌고 만주로 집단망명을 결행했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정월이었다. 전대미문의 아리랑 고개. 멀고도 험난한 형극의 길이었다.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가 기울어 가던 구한말, 경북의 올곧은 선비들은 그렇게 아리랑 고개를 넘었다.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집안의 명운과 가족의 생사까지 내던지며 모진 아리랑 고개를 넘었다. 가진 것들을 누리며 편안한 여생을 보내도 될 나이였지만, 국권과 자존을 되찾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사즉생(死卽生)의 길이었다. 당시 지배계급인 양반으로서 솔선수범해야 할 도덕적 의무라고 생각했다. 학문을 한 선비로서 마땅히 가야 할 실천적 삶이라 여겼다.

반세기에 걸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사에서 경북인의 항일투쟁은 특별했다. 의병항쟁과 만세운동 그리고 구국계몽과 사회주의 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 걸친 항쟁이 시종일관 지속된 곳은 경북이 유일했다. 의병을 가장 먼저 일으켰으며, 전국에서 가장 많은 순절자가 나왔다.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인물이 가장 많은 것만으로도 대구경북이 독립운동사에서 가지는 위상을 웅변하고도 남는다.

대구는 국채보상운동의 횃불을 댕긴 곳이요, 광복회를 탄생시켜 의병과 계몽운동의 통합을 이루며 독립군 자금을 확보하고 의열투쟁의 기반을 구축했다. 그것이 3·1운동에서 민주공화정의 요구로 표출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유림단 사건의 본고장으로 만주 독립군기지 건설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의열투쟁과 6·10만세운동의 핵심을 이룬 인물들도 대구경북인이었다.

항일 민족문화의 찬란한 꽃을 피워 올린 이상화와 이육사의 이름 또한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일제에 대한 대구경북인의 저항은 이렇게 격정적이었고 지속적이었으며 그만큼 희생 또한 컸다. 그렇게 견위치명(見危致命)하며 숱한 아리랑 고개를 넘어온 경북의 정신과 실천적 삶이 광복을 이루고 전쟁을 이겨내며 산업화와 민주화를 거쳐 오늘날 한류의 시대를 연 것이다.

파란만장한 겨레의 역사는 숱한 아리랑 고개를 넘어온 고난의 행로였다. 20세기에 들어서만도 망국과 분단과 전쟁과 파산(破産)까지 겪었다. 좌절과 시련의 고개였지만 다시 희망을 안고 넘어야 했던 숙명의 고개이기도 했다. 이제 또 하나의 아리랑 고개를 넘어야 한다. 흥망의 분수령이다. 국가의 정체성이 왜곡되고 자유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경제의 성장 엔진이 식어가고 있다.

사회의 도덕성이 무너지고 위선과 망발이 난무하고 있다. 지리멸렬한 외교와 안보는 북한의 핵 위협과 욕설만 자초했다. 전례 없는 분열과 갈등을 안고 망국(亡國)열차가 질주하고 있다. 제동을 걸어야 하는데 멸사봉공하는 정치인 하나 없다. 사즉생의 결기를 보이는 강단 있는 지도자 하나 없다. 대구경북의 혼은 어디로 갔는가. 2020년 아리랑 고개를 어떻게 넘을 것인가. 말로만 보수를 외치면서 해묵은 탐욕의 보따리만 덕지덕지 껴안고 아리랑 고개를 넘어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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