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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숙의 옛그림 예찬]조영석(1686~1761) '노승헐각'

미술사 연구자

비단에 담채, 26.8×17.2㎝, 간송미술관 소장
비단에 담채, 26.8×17.2㎝, 간송미술관 소장

관아재 조영석이 주변에서 찾은 그림거리 중 스님을 그린 그림이다. 왼쪽 위에 '관아재 사(觀我齋寫)'라고 쓰고 백문방인 '관아재'를 찍었다. 노스님이 나무 둥치와 지팡이에 기대 다리쉼을 하고 있는 광경이어서 '노승헐각(老僧歇脚)'으로 제목이 붙여졌다. 눈 꼬리는 처졌지만 눈빛은 또렷한 삼각형 눈에 광대뼈가 튀어나온 얼굴의 스님은 수염이 무척 성글다. 입이 합죽해 보이는 것은 이가 좀 빠졌기 때문인 듯. 길쭉한 모자 안으로는 동그란 민머리가 나지막하다. 목에는 굵은 염주를 둘렀고 짚신이나 미투리일 초혜(草鞋)를 신었다. 메었던 바랑을 풀 섶에 툭 던지고 소나무 뿌리에 걸터앉으며 "휴우~"라고 하셨을 것처럼 생생하다.

스님의 이목구비와 차림새, 앉은 자세가 자연스러워 한참을 모델로 모셔두고 그렸을 것이다. 조영석은 굵은 선과 가는 선, 짙은 선과 옅은 선, 속도감 있는 선과 침착한 선 등 필선 자체를 주된 조형요소로 활용해 함축미 있게 대상의 특징을 묘사했고, 옅은 먹과 은은한 담채로 노스님의 모습을 친근하면서도 실감나게 나타냈다. 조영석이 선의 표현력을 통해 보여준 격조 높은 화면은 화가가 자신의 눈으로 본 일상의 회화화가 감상화의 한 분야로 진정하게 시작되었음을 분명히 알려준다.

조영석은 이렇게 실물을 직접 대하고 그리는 '즉물사진(卽物寫眞)'을 해야 살아있는 그림인 '활화(活畵)'가 된다고 했다. 그림 교과서인 화보(畵譜)나 옛 그림에 나오는 정형(定型)에 의지해 공인된 레퍼토리를 반복했던 앞 시대 화가들과 다른 태도였다. 고상한 고급 교양인 감상 회화는 오랜 미술의 역사 속에서 다듬어지며 축적된 고전을 모범으로 삼는 상고(尙古)주의의 틀 안에 있었다. 조영석은 그런 고정 관념을 허물어 감상화의 영역에 주변의 삶을 들여놓았고, 이러한 조영석의 생각과 실천으로 인해 조선후기 회화는 '풍속화'라는 새로운 영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 풍속화에는 양반도 나오고 농공상(農工商)의 생업에 종사하는 백성을 비롯해 기생과 스님 등 특수한 직업과 신분의 인물도 나온다. 스님은 그림에 일찍이 나타났다. 인평대군 이요(1622-1658)가 그린 것으로 전하는 스님 그림도 있고 윤두서(1668-1715)도 스님을 그렸다. 김홍도, 김득신, 신윤복 등 화원화가들도 스님을 그렸다. 신윤복은 비구니 스님과 동자승을 출연시키기도 했지만 풍속화에서 스님은 대부분 노승이다. 왜 노승일까? 혈족의 인연을 끊고 세상을 등지고 출가한 스님의 나이든 모습이 누구나 늙고 결국은 죽는다는 분명한 진실을 더 확실히 일깨워주기 때문인 것 같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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