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동시대 예술가들에게  

김현규 극단 헛짓 대표, 연출가

김현규 극단 헛짓 대표, 연출가
김현규 극단 헛짓 대표, 연출가

지난주 매일춘추에서 예술의 가치에 대해 개인적인 질문을 쏟아냈다. '가치'의 사전적 뜻은 '사물이 지니고 있는 쓸모' '대상이 인간과의 관계에 의하여 지니게 되는 중요성' '인간의 욕구나 관심의 대상 또는 목표가 되는 진, 선, 미 따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즉 개인에 따라 쓸모, 중요성, 관심, 진, 선, 미는 다르기 때문에 가치는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단순히 만 원짜리가 천 원짜리보다 가치 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술적 가치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예를 들어 같은 날 똑같은 공연을 보고도 관객에 따라 공연에 대해 느끼는 가치 정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지인의 소개로 미술관의 큐레이터와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예술의 가치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게 되었는데, 그 큐레이터는 예술의 가치는 돈과 비례한다고 했다. 큐레이터 다운 말이었지만 나로서는 불쾌한 언사였다. "피카소의 작품이 천억이 넘는 금액에 거래되기 전까지는 그만한 가치가 없었나요?" "그럼, 피카소의 작품이 큰 금액에 거래되기 전에 당신은 피카소를 알고 있었나요? 더 좋은 판단 기준이 있다면 제시해주세요." 더 좋은 판단 기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내가 어떠한 답을 하게 되더라도 그건 또 다른 개인의 판단 기준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모순에 빠진 나를 발견하고 얼른 입을 닫았다.

예술은 가치를 따질 수 없다. 피카소의 그림이 초등학생이 미술시간에 그린 그림보다 비싸므로 더 가치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각장애인 초등학생이 시력을 되찾고 처음으로 그린 그림이 있다면 그 부모에게는 피카소의 그림보다 더 가치 있는 그림이 될 것이다. 즉 경험하는 개인에 따라 그 가치는 상대적일 수 있으나 일반화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다만 그 부모의 가치판단이 있듯이 '나만의 기준'으로 가치판단을 하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예술가는? 일반화될 수 없는 대중의 가치기준을 쫓아야 하는 것일까? 뒤샹이 소변기를 뒤집을 때 예술은 더 이상 의미를 담는 그릇이 아닌 의미 그자체가 되었다. 대중이 소변기를 보고 무엇을 느끼든 상관하지 않았다. 뒤샹에게 '마르지 않는 샘물' 이 있듯이 나와 동시대에 사는 예술가들도 '마르지 않는 샘물'이 있어야 한다. 대중은 없다. 허니버터칩을 찾아 벌떼처럼 쫓아다니는 대중은 지금 어디 있는가? 더 이상 대중의 눈치만 보고 있기에는 우리에게 할 말이 많다. 나만의 언어로, 진정성 있는 나만의 의미로 무대를 만나길 기대한다. 김현규 극단 헛짓 대표, 연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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