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영한 SBS 드라마 'VIP'는 애초 이 정도의 기대작이 아니었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보란 듯이 15%를 넘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고 화제성도 뜨거웠다. 도대체 이 작품의 무엇이 이런 결코 적지 않은 성취를 가능하게 했을까.
◆별 기대가 없었던 작품, 그러나
SBS 드라마 'VIP'는 방영 전까지만 해도 굉장한 기대를 갖게 만드는 작품은 아니었다. 물론 장나라 같은 신뢰를 주는 배우에 대한 기대는 있었지만 작가와 감독 모두 첫 입봉작이라는 사실이 그랬다. 이 대본을 쓴 차해원 작가는 공모전에 당선된 후 첫 작품이고, 이정림 감독 역시 첫 연출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큰 기대를 가질 수는 없었다.
이런 낮은 기대감 속에서도 첫 회 시청률이 6.8%(닐슨 코리아)를 기록한 건 꽤 선전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VIP'는 단 몇 회 만에 시청자들을 주인공 나정선(장나라 분)의 시선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날아온 문자 메시지 하나를 통해서였다. 같은 VIP 전담팀의 팀장인 남편 박성준(이상윤 분)이 팀내 내연녀를 뒀다는 메시지. 나정선은 그 후 팀원들을 하나하나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게 되고, 시청자들도 누가 내연녀일까 하는 궁금증에 빠져들었다.
이런 궁금증은 결국 '불륜'이라는 소재가 가진 힘일 수 있었다. 그래서 관심은 증폭되었지만 그것만으로 'VIP'가 순항하기는 어려웠다. 여기서 'VIP'는 또 다른 카드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불륜'이라는 소재에 사회적 함의를 담아 넣을 수 있는 우리네 사회의 돈으로 구분되는 계급구조의 현실이었다. 성운백화점의 VIP들을 위해 파티를 열어주기도 하고 그들만을 위한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이 전담팀의 일은 심지어 그들의 불륜까지 덮어주는 것이었다.
부부이자 팀장과 팀원인 박성준과 나정선의 관계는 그래서 사적인 관계와 공적인 관계가 중첩되며 애매해진다. 자신들에게 벌어진 불륜은 사적인 관계로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면서도 VIP들의 불륜은 감춰주는 게 그들의 일이 된다. 불륜이란 소재가 자본화된 세상의 사회적 의미를 끄집어내는 불쏘시개 역할을 해주게 된 것이다. 'VIP'는 이처럼 통속적일 수 있는 불륜이란 코드를 가져와 자본으로 서열화된 우리네 사회의 적나라한 민낯을 꺼내놓는다.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들의 현실과 판타지
'VIP'는 여기에 사회생활을 하는 여성들의 현실에 대한 공감과 판타지를 그려 넣는다. 결코 호락호락하게 밀려나지 않는 나정선 같은 리더십을 가진 여성을 중심으로, 시크한 매력으로 전담팀의 모든 일을 척척 해내는 에이스 이현아(이청아 분)라는 든든한 걸크러시 캐릭터와, 육아문제로 회사에서 승진하지 못하고 만년 사원으로 살아가는 송미나(곽선영 분) 그리고 누구보다 동료로서 함께 아파하고 즐거워해주는 강지영(이진희 분) 같은 여성들을 포진시킨다.
물론 이 드라마는 전면에 페미니즘적 관점을 내세우지는 않지만 남성들의 세계와 여성들의 세계를 병치해 놓는다. 박성준과 그를 끌어주는 하재웅 부사장(박성근 분) 라인이나 배도일(장혁진 분)처럼 권력을 위해서는 뭐든 하고 심지어 성추행까지 일삼는 남성들의 세계가 그 라인문화에 의해 세워져 있다면, 나정선과 친구이지만 팀원인 이현아와 송미나, 강지영은 이 성운백화점에서 늘 한 걸음씩 밀려나 있지만 서로를 토닥이며 동지의식의 끈끈한 연대를 보여준다. 드라마가 보여주는 전담팀에서 실제로 일을 하는 이들은 대부분 여성들이지만 이들의 팀장이 박성준이라는 점은 우리네 사회의 기울어진 운동장을 담아낸다.
물론 성차별적인 현실만을 드라마가 강조한 건 아니다. 거기에 바람직한 남성상의 판타지들을 대안적으로 채워 넣음으로써 드라마는 균형감각을 유지했다. 장관 아들이지만 신분을 속이고 건실하게 팀원으로 일하며 나정선을 때로는 위로해주기도 하는 마상우(신재하 분)나, 성추행 사건을 미투 폭로한 일로 사내에서 편견의 시선을 받는 이현아를 든든하게 지지해주고 바라봐주는 차진호(정준원 분) 그리고 워킹맘으로서의 고충을 뒤늦게 이해하고 아내 송미나를 돕기 위해 나서는 이병훈(이재원 분) 같은 남성들이 그들이다.

◆두 개의 세계, 당신에게 진짜 소중한 사람은
그래서 드라마는 두 개의 세계를 병치시킨다. 하나는 VIP들과 그들을 보좌하는 수직적 관계로 이뤄진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그런 수직적 세계 속에서 겪는 어려움과 서러움들을 서로 공감하며 보듬어주는 수평적 세계다. 박성준은 하재웅 부사장의 내연녀들과 차명계좌를 관리함으로써 이사로 승진하지만 그 수직적 세계가 그를 행복하게 해줄 지는 미지수다. 그는 자신의 연민을 사랑으로 착각하고 부사장의 딸인 하유리(표예진 분)와 내연관계를 이어가지만, 갑자기 다쳐 쓰러진 아내 나정선을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아내를 보살핀다. 수직적 세계가 만들어내는 막연한 사랑과 성공이라는 판타지가 실상은 불륜이자 욕망이었다는 그를 통해 드러난다.
반면 이 힘겨운 현실 속에서 이현아는 차진호와 드디어 마음을 열고 가까워지고, 송미나는 남편 이병훈과 위기를 이겨내고 알콩달콩한 가정으로 돌아온다.
'VIP'는 그래서 이 두 개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두 개의 VIP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현실에서 우리가 갑이라 부르며 고개를 숙이고 그들의 허물조차 감춰주던 저 VIP와, 그런 현실에서 돌아와 서로를 다독이는 진짜 VIP 중 어느 쪽이 더 소중한가에 대한 질문이다. 그 답은 이미 나와 있지만 우리는 종종 그걸 잊는다. 자본화된 사회가 주는 화려해보이기만 하는 저들의 겉모습에 눈이 멀어서.
'VIP'는 첫 입봉작이라고 믿기 힘든 작가와 감독의 역량이 묻어난 작품이다. 이렇게 불륜이라는 소재를 과감하게 가져와 시청자들의 시선을 끌어 모은 후 거기서 확장해 사회적 함의까지 끄집어내는 대본이 그렇고, 대단히 섬세한 감정 표현을 인물들의 손짓 하나 대사 하나에도 집중하게 만든 연출이 그렇다.
게다가 김준석 음악감독의 효과적인 배경음악은 드라마 매회 말미마다 한 편의 뮤직비디오를 보는 듯 압축적이면서 호기심을 자아내는 연출과 더해져 폭발적인 시너지를 만들어냈다. 여기에 장나라와 이청아, 곽선영 같은 연기자들의 호연이 더해져 대본, 연출, 연기의 삼박자를 갖춘 작품이 될 수 있었다. 애초 예상을 훌쩍 깨는 결코 적지 않은 성취를 이뤄낸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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