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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 속 숨은 이야기 <23> 하늘의 별이 된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작,
빈센트 반 고흐 작, '별이 빛나는 밤'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 캔버스에 유화, 73.7 x 92.1cm, 1889, 뉴욕현대미술관

'Starry, starry night', 이 노래는 애잔한 멜로디와 노랫말로 우리의 가슴을 저미게 하면서 우리 눈앞에서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그림 〈별이 빛나는 밤〉이 펼쳐지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음악을 들으며 동시에 그림을 떠올리는 공감각을 이토록 잘 불러일으키는 노래도 없을 것 같다. 미국 작곡가이자 가수 돈 매클린은 1971년, 고흐의 이 그림에서 출발해 서른일곱의 나이로 하늘의 별이 된 불멸의 예술가를 기리는 명곡을 만들었다.

〈별이 빛나는 밤〉은 고흐가 프랑스 남부의 작은 도시 생 레미 드 프로방스의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던 시기의 작품이다. 자살충동을 느꼈던 그는 1889년 5월 8일, 그동안 머물던 아를을 떠나 그곳에서 멀지 않은 이 도시의 수도원을 개조한 정신병원에 자발적으로 입원했다. 1년간 머무는 동안 3번의 심각한 발작을 일으켰던 때를 제외하곤 그는 병원 측에서 1층에 마련해준 작업실에서 매우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렸다. 이 시기 그림에서 분절된 붓 터치를 여러 겹 덧칠한 소용돌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별이 빛나는 밤〉에서 짙푸른 밤하늘은 빙빙 돌아가는 크고 작은 11개의 노란 별로 구성되어 있다. 화면 전체를 장악하는 넘실대는 아라베스크(arabesque) 배열 중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좌측에서부터 중앙으로 넘어오는 큰 소용돌이이다. 정신질환이나 주체할 수 없는 창조에너지의 정점을 상징하는 듯한 이 소용돌이는 어쩌면 고흐가 스스로 자신을 파괴할 것을 예감해서 표기한 암호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화면 하단의 삼나무(cypress)도 하늘을 향해 넘실대며 올라간다. 서양에서 전통적으로 애도의 표상으로 무덤가에 심는 삼나무는 프로방스 지방에서는 흔한 나무이다. 병원 창문에서 내려다본 풍경을 그렸으나 이 그림은 실제 풍경은 아니다. 예컨대, 성당의 뾰족한 첨탑 장식은 고흐의 고국인 네덜란드의 교회 스타일이다. 그림은 실제의 묘사가 아니라 내면 감정의 표출이라고 믿었던 그에게 이 그림은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확립한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아를 시기부터 이미 고흐는 밤 풍경에 매료되어 1888년에 〈밤의 카페 테라스〉, 〈론강 위에서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렸다. 파리의 화랑에서 근무하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밤은 낮보다 훨씬 더 풍부한 색감으로 빛난다'며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마침내 1889년 9월, 고흐는 완성된 〈별이 빛나는 밤〉을 테오에게 보냈고, 이 그림은 이듬해 4월에 당시로선 아방가르드적인 공모전이었던 '엥데팡당'(Indépendant)에 출품되었다.

고흐의 정신질환에 대해 현대의 의사들은 무려 30여 개의 각기 다른 진단을 내렸다. 그중 조현병, 양극성장애, 납중독, 간질, 어지럼증과 이명을 동반하는 메니에르(Meniere)병 등이 가장 많이 언급되는 병명이다. 이 다양한 병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납중독은 아를 시기의 작품, 예를 들어 그의 유명한 〈해바라기〉 연작에서처럼 납 성분이 포함된 카드뮴 옐로 물감을 많이 사용한 데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거기에 오로지 작품 제작에만 몰두한 탓에 과로와 영양실조가 겹쳤고 불면증, 외로움을 잊기 위해 자주 마신 압셍트도 한몫 했을 것이다. 녹색의 압셍트는 19세기 말엽 가난한 예술가들과 노동자들이 즐겨 마셨던 값싼 독주로, 이름이 일컫듯 향쑥(absinthe)이 주재료인데 향쑥은 심할 경우 시각장애 및 정신착란을 일으켰다.

고흐는 인상주의 화가 피사로의 권유로 정신병원에서 퇴원하고 파리에서 30km 북동쪽에 있는 오베르 쉬르 와즈로 옮기게 된다. 테오는 이곳의 의사 폴 가쉐에게 형을 진료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가쉐 박사의 지극한 보살핌 덕분에 고흐는 생애 마지막 70일 동안 무려 70여 점의 작품을 제작하며 창조적 정점에 도달할 수 있었다. 1890년 7월 27일, 까마귀들이 날아가는 밀밭을 그리던 중 한 발의 총소리와 함께 그는 자신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전설이 되어 버렸다. 2011년, 퓰리처상 수상 전기 작가 S. 나이페트와 G. 스미스는 마을에서 오래 전부터 떠돌던 소문을 추적한 결과로 새로운 가설을 발표했다. 즉, 고흐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마을의 10대 소년 셋이 카우보이 놀이를 하면서 당긴 총알의 피해자라는 것인데, 진위를 확신하긴 아직 이르다.

테오도 매독 후유증에 의한 신경손상으로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테오의 부인 조안나는 1914년에 남편의 관을 네덜란드에서 오베르 쉬르 와즈의 고흐 무덤 바로 옆으로 이장시킴으로써 생전에 각별했던 형제는 사이좋게 나란히 영면하게 되었다. 죽기 몇 년 전부터 이름이 알려졌던 고흐의 작품 전부는 조안나와 그녀의 아들 빈센트에게 상속되었는데, 오늘날까지도 화가 고흐에게 쏟아지는 식을 줄 모르는 모든 영광은 오로지 그녀의 헌신 덕분이다. 그녀는 천정부지로 오르기 시작한 그림 가격에도 함부로 그림을 팔지 않고 유럽과 미국의 가장 유명한 미술관에 고흐의 그림이 소장되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고흐가 생전에 테오를 비롯해 화가들과 교신했던 편지들을 세심하게 정리한 서간집을 1914년에 발행했다. 화가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훌륭한 텍스트인 편지들은 현재 총 902통으로 819통은 고흐가 보낸 것이고 83통은 그가 받은 것들로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박소영(전시기획자, PK Art & Media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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