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울진 스토리텔링 문화공모전 수상작 -대상 '도깨비의 금강주(金剛酎)'<2>

삽화 김진영 명덕창조의아침 원장
삽화 김진영 명덕창조의아침 원장

대상-단편소설 도깨비의 금강주(金剛酎) 박효정

그렇게 짧은 여름밤이 깊어 새벽이 가까울 무렵 갑자기 바다에서부터 광풍이 몰아치고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한 순간에 비를 쫄딱 맞은 도깨비들이 비를 피해 모두 월송정 정자로 모였다. 자리가 비좁은 터라 서열이 낮은 도깨비들은 작은 물건으로 둔갑하여 정렬하고 대장들만 아직 가시지 않은 흥을 억누르며 사람형상으로 둘러앉았다. 갑작스레 달라진 분위기에 서로의 퀑한 얼굴만 쳐다보다 두방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동해 용왕이 승천을 하나 갑자기 웬 비벼락인고."

"글쎄 말이다. 이제 막 시작했는데. 그런데 오늘 왜 오라고 했지? 누가 오라고 했지?"

그제야 쫄매가 오늘 모임에 대해서 물었다.

"엥? 그래 오늘 우리가 왜 모인 거지? 왜 모인 줄 아는 도깨비 있어?"

김서방의 말에 모두가 어리둥절, 서로 얼굴을 보며 고개만 절래 절래 흔든다. 그때였다.

"그래 이놈들, 이제야 모인 이유가 궁금하더냐?"

월송정 옆 소나무 숲에서 나지막하지만 위엄 있는 목소리가 도깨비들의 귀를 때렸다.

"뭐야! 여기 우리 말고 다른 도깨비들이 있었던 것이야?"

쫄매가 가장 먼저 자리를 일어나 방망이를 꺼내들고 숲을 쳐다본다.

"이놈! 도깨빈지 귀신인지 남의고을에 와서 감히 우리를 기만하고 놀리려 하다니 오늘 혼구녕을 내줘야겠구나!"

장대기와 이대감도 흥분하여 일어섰다. 하지만 이백년을 넘게 산 두방과 김서방은 순간 그 목소리의 존재를 바로 알아차렸다.

"이것 봐 자네들, 화내지 마시게. 자네들이 화를 내어 맞설 분이 아니시네."

두방이 흥분한 도깨비들을 말리자 김서방이 정자를 내려가 허공에 허리를 길게 굽힌다. 그러자 바다 맞은편 어두운 산을 등지고 한 노인이 김서방 앞으로 다가섰다.

"잘 계셨는지요."

김서방이 인사를 건네고 두방도 허리가 꺾어져라 몸을 숙인다.

"자네들 이리와 인사하시게."

김서방이 말하자 다른 도깨비들이 얼떨결에 나와 묻지도 못하고 허리를 굽힌다.

"산의 정령이시네."

두방이 노인을 소개했다.

"산의 정령? 내가 산에서 산군(호랑이)은 가끔 봤어도 산의 정령은 처음 들어 보네. 자네들은 들어봤는가?"

쫄매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묻자 다른 도깨비들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만 흔든다.

"영감님, 이렇게 서계실 것이 아니라 정자에 오르시지요."

김서방이 정령에게 팔을 펼쳐 안내하자 정령은 정자 가장자리 한쪽에 자리를 잡는다.

슬금슬금 꼬꾸라져 앉는 자세를 취하며 쫄매가 김서방에게 다시 묻는다.

"산의 정령이 뭐하는 분인고?"

"야 이놈아! 너는 참 궁금한 것도 많아. 이 영감님께서는 소광리 대왕소나무에 기거하시는 분인데 고을에 산과 골짜기, 목신들을 다 관장하시는 분이라."

김서방이 쫄매의 귀를 잡아당기며 말한다.

"그럼 뭐 우리하고는 별 상관도 없는 분이네. 안 그러나?"

옆에서 듣고 있던 장대기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참, 참, 참. 이 무식한 도깨비 놈들, 너희들 단디 들어라 잉? 김 서방하고 나하고 그냥 이백년 넘게 살겠나. 다 여기계신 영감님 덕분인 것이라. 도깨비 귀물이 사람들 눈에 띄고 사람 손 타기 시작해봐라. 몇 년을 견디겠냐. 이 영감께서 귀신도 모르는 곳에 귀물을 숨겨서 우리를 보호하고 계신기라. 알아듣겠나. 으잉?"

두방의 말이 끝나자 다른 도깨비들이 일제히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 오늘 너희를 귀하게 부른 것은 필시 너희와 의논할 어려운 문제가 있어서다. 새벽도 가까워 왔으니 여기 여섯의 우두머리만 남고 나머지는 다 물리거라."

정령의 말이 끝나고 우두머리들이 뒤를 돌아 눈짓하자 나머지 도깨비들이 순식간에 흩어져 사라졌다.

"영감, 저희 같은 도깨비와 의논이라니요. 그 일이 대체 무엇입니까?"

"관내에 역병이 돌고 있네. 예전에 보지 못한 지독한 역병이야."

"역병… 내 말했지. 고을에 몹쓸 불청객 왔다고 소문에도 여간 고약한 역병이 아니라 카네."

쫄매가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높인다.

"그래 자네가 말한 그대로네. 이대로 두면 자네 집 쫄매 아낙도 모레면 자리에 눕게 될 걸세. 뿐만 아니라 며칠 후면 시장은 물론 논밭에 사람하나 없고 12고개 바지게 꾼들도 죄다 자리에 눕게 될 거야. 이번 역병은 한번 자리에 누우면 그 길로 다시 일어나기 힘들 것이네."

"에잉, 우리 집 쫄매가, 쫄매가… 이 일을 우짤꼬!"

쫄매의 어깨가 털썩 내려앉는다.

"그럼 이대감집 상머슴은 어찌 됩니꺼?"

"그 머슴도 오늘부터 보름을 못 넘긴다."

"머라꼬예? 보름… 아이고, 아이고, 우리머슴 불쌍해서 우짜노. 지난달에 아들 낳았는데. 딸내미 둘 낳고 아들 봤다고 쌀가마 번쩍 뻔쩍 들며 지랄발광으로 좋아했는데. 이 일을 우짜노."

이대감이 대성통곡을 한다.

"누구 짓입니꺼? 마마가 와서 장정까지 잡아 갈리는 없고. 또 그놈의 애기도깨비 짓입니꺼?"

김서방이 화가 난 듯 정령에게 물었다. 애기도깨비는 어릴 때 죽은 아기들의 정기로 생겨난 도깨비로 누구에게나 앙탈을 부리며 투기심으로 이곳저곳에 전염병을 옮기는 도깨비다.

"애기도깨비는 아니다. 그 놈이 떠돌며 온갖 병을 옮기긴 해도 그렇게 앞뒤 없이 악한 놈은 아니다."

"엥? 그럼 누구란 말입니까. 애기도깨비라면 몽둥이로 족쳐 처방이라도 낼 것인데."

김서방이 답답하고 분한 듯 주먹을 부르르 떨자 정령이 소매 춤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펼친다. 종이위에는 요상한 요괴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요괴는 붉은 물감을 뒤집어 쓴 듯 몸은 온통 붉고 부리부리한 눈과 큰 뿔까지 달려있어 흉하기 이를 때 없었다.

"자네들 이놈을 본적 있는가?"

정령이 종이를 펼쳐 묻자 도깨비들이 저마다 모른다하며 고개를 젓는데, 그동안 관심 없이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 있던 장대기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 커진다.

"아! 이놈 이놈, 오, 오, 오닙니다 오니."

장대기가 급한 나머지 더듬거리며 말했다.

"엥? 오니? 그런 놈도 있나? 이백년 넘게 산 나도 못 봤는데 자내가 어찌 봤는가? 괜히 영감 앞에서 장난질하는 거 아니여?"

김서방이 의심스러운 듯 묻자

"허허 참, 이놈은 이 땅 것이 아니야. 그러니 자네도 모르지. 오래산 것이 유세도 아니고. 정령님, 이놈은 저기 저 바다 건너 왜국에서 온 놈입니다요. 얼마 전에 자기가 가져왔다며 얄궂은 떡도 하나 나눠 먹었지요."

"그래, 자네가 본 오니라는 요괴에 대해 이야기 해 보거라."

"예. 오니 고놈은 영감이 보여주신 그림 그대로 생겼고요. 바다건너 왜 나라에 사는 우리 같은 도깨비라 했습니더. 어디서 구했는지 호피로 두른 손바닥만 한 저고리를 입고 울퉁불퉁한 쇠방망이를 들고 다니고요. 화가 나면 몸이 집체만큼 커지기도 합니더."

"그래 그놈의 성질머리는 어떠하더냐?"

"아 글쎄, 그 놈이 장군도깨비 마냥 머리에는 커다란 뿔을 달고 몸통은 울긋불긋 흉악해 보여도 그놈이 말뿐이지 제 눈에는 사람 잡아먹을 만큼 그리 악하게 보이진 않았습니다. 떡이며 술도 나누어 먹을 줄 알고."

"에이구 이놈아, 썩을 도깨비 놈아. 바다도깨비 좋아하네. 그놈이 주는 술떡 조금 얻어먹고 맹~하니 속아 자빠지냐?"

김서방은 분한 듯 장대기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연신 쏘아 붙였다.

"에이구, 지가 지 입으로 그리 사악하다 하는 놈을 보는 즉시 '칵' 잡아야지. 너 혹시 그놈한테 흠신 혼나고 싹싹 빌어 친구 삼은 거 아니가?"

"아니다, 아니다. 맨 처음 그놈이 서로 힘자랑 한번 해보자기에 내가 발을 딱 쳐서 자빠트렸다. 그리고는 화가나 덩치가 집체만큼 커져 또 달려들기에 장대기로 수십 대나 후리 쳐줬다. 살려달라고 빌기는 그놈이 빌었지."

장대기는 억울하다는 듯 울먹이며 말했다.

"그래, 그놈을 잡을 수 있겠나? 필시 그놈은 고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12고개를 넘어 태백장으로 갈 것이다. 그리되면 그때부터는 놈을 잡을 수 없다."

정령이 심각하게 말했다.

"잡을 수 있습니다. 그 놈이 귀물을 숨겨 놓은 곳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그래 다행이다. 그럼 내일 모두 후포항으로 은밀히 모이 거라. 시간이 없다."

어느덧 여명이 밝아오고 정령도 도깨비도 모두가 홀연히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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