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그날은 설 명절을 막 보낸 음력으로 정월 초아흐렛날이었다. 양력으로는 2월 21일이다. 서상돈, 김광제에 의해 대구 광문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처음으로 발의된 지 24일째 되는 날이다.
이날 대구성 밖 북후정에서는 대구상공회의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대구민의소 주최로 국채보상을 위한 첫 군민대회가 열렸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도 유명한 언론인 장지연은 대한자강회월보를 통해 이날 대회 광경을 '달구벌 내외일향(內外一鄕) 유지신사 서상돈 제씨 등 수백 명이 북후정에서 대회 하니 모인 사람이 남녀노소 무릇 수만 명'이라고 기술했다. 그는 모인 사람들이 대회에서 '국채보상을 만장일치로 박수갈채하고 각자 주머니를 풀어 의연하매 의연을 고취하는 소리가 소나기로 물이 넘쳐흐르듯 했다'고 감격스러워했다. 그뿐만 아니라 군민대회에 참가한 '노소 신사와 청홍 부녀들과 술 파는 아낙과 차 파는 노파, 다리를 저는 걸인과 백정, 책을 낀 동자와 제기 차는 아이들까지도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의기 분발하였다'고 대회 분위기를 전했다.
대한매일신보도 이날 집회에서는 '회원뿐만 아니라 부녀자들도 동참해 기꺼이 패물을 내놓았고 심지어 걸인, 백정, 마부, 채소 파는 여인, 술 파는 노인, 인부 등까지 돈을 내었고 첫날에 모인 돈이 거의 500원이나 되었다'고 보도했다.
1907년 2월 21일! 국채보상운동은 이날 대구성 밖 북후정에서 이렇게 뜨겁게 시작되었다. 나라를 구하려는 간절한 민심에 불을 댕긴 국채보상을 위한 군민대회는 사흘 뒤 서문시장 장날인 24일에도 한 차례 더 열리며 열기는 뜨겁게 타올랐다.
일본 경찰이 출동해 연설 중인 사람을 연행하며 해산에 나서는 등 방해가 시작되었지만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 소식은 신문에 잇따라 실리면서 전국으로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남녀노소나 신분의 구별 없이 전 국민이 하나가 되어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펼쳐나간 국채보상운동은 전례 없는 국민 통합의 장이 되었다. 또한 그것은 나라와 국민의식을 일깨우며 나라의 주인은 국민이며 국가가 없으면 국민도 없다는 국권과 민권의식을 우러나게 하는 결정적 발로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것은 왕조 및 군주제를 넘어 시대적 흐름인 근대 국민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간절함의 몸부림이기도 하였다.
일본의 집요한 방해와 탄압으로 국채를 보상하는 데는 결국 실패했지만 그 숭고한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은 3·1운동과 독립운동으로 면면히 이어졌다.
대구시는 이러한 국채보상운동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올해부터 대구시민의 날을 2월 21일로 정했다. 늦었지만 참으로 잘한 결정이다.
유네스코도 국채보상운동 기록물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했고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국내외 관심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어 대구시민의 날 지정은 더욱 의미를 더한다. 백기만은 대구를 '삼남의 제일웅도 나라의 심장'이라고 노래했다.
대구시민의 날을 통해 이러한 대구의 가치와 정신을 더욱 공고히 해 나가는 것이 이제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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