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민주운동(이하 2·28)은 1960년 2월 28일 대구 지역 8개 고교생들이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부정부패에 맞서 궐기했던 운동이다. 28일, 갑일(甲日)을 맞아 2·28민주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2·28의 세계화를 위해 영문판 '2·28,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운동'을 출간한다.
책의 1장은 2·28의 배경, 2장은 2·28의 전개, 3장은 4·19혁명으로의 계승, 4장은 2·28의 의의를 다루고 있다. 필자는 책의 제목이 담고 있는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운동'의 뜻을 통해 2·28의 역사적 의의를 조명해 보고 번역 과정과 의의를 설명하고자 한다.
2·28은 12년에 걸친 이승만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일어난 '민주'운동이다. 그리고 1919년 상해임시정부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쓴 이후 일제가 아닌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일어난 '최초'의 운동이다. 그렇다면 2·28을 왜 봉기나 의거가 아닌 '운동'(Movement)으로 보는가?
단체 행동을 운동으로 명명하기 위해서는 집회 참여자들이 집회의 동기를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집회 주도 세력들이 결속되어 있어야 하며, 목표가 성취될 때까지 계속 투쟁할 수 있어야 한다. 2·28은 이 세 가지 조건을 갖춘 '운동'이다.
첫째, 2·28의 직접적 계기는 야당인 장면 부통령 후보의 선거 유세에 학생들의 참여를 막으려고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등교 지시를 내린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등교 지시의 이면에 숨어 있는 한국 사회의 문제를 직시했고 민주라는 가치와 학원의 자유 및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궐기했다. 그들이 외친 "민주주의를 살리고 학원에 미치는 정치권력을 배제하라"와 "학생의 인권을 옹호하자"라는 구호를 보면 그들이 운동의 동기를 숙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2·28의 주도 세력은 학생·시민·언론의 연대였다. 도시인구의 급증에 따른 생활 여건의 악화와 높은 실업률은 정부에 대한 불만을 증폭시켰다. 근대교육의 확대는 시민의식을 고취했고 언론 보급의 확대는 정치·경제적 모순을 부각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분연히 일어선 것은 피 끓는 고등학생들이었으며, 그들의 운동을 시민은 지지했고, 언론은 보도했다.
끝으로 2·28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었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전주, 대전, 수원·충주, 부산·청주에서의 시위로 이어졌으며 3·15마산의거로 귀결되었다. 4월 19일엔 서울·인천·광주에서 시위가 이어졌으며 4월 26일엔 이승만의 하야를 이끌어냈다. '4·19혁명'이란 4월 19일 당일의 항거뿐만 아니라 2월 28일에서 4월 26일까지 일어난 일련의 투쟁을 뜻한다. 그러므로 2·28은 세상이 어둠에 떨고 있을 때, 선봉에서 길을 연 횃불이었다.
결론적으로 2·28은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운동'인데 이 사실을 국내외에 더 알리기 위해 영문판이 마련되었다. 필자와 경북대 박사 과정의 로버트 존스(Robert Jones)가 책임을 맡아 작년 4월부터 6개월 동안 작업하였다. 그 후 2·28기념사업회 우동기 회장의 주선으로 원어민 교수 세 분이 정밀하게 교정을 보았으며, 또다시 필자와 존스가 원문과 수정본을 대조·분석·취합하여 완성하였다.
역사적 사실의 정확한 전달과 가독성을 높이는 데 최선을 다했다. 영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눈 덮인 들판을 처음 걷는' 심정으로 세상에 내놓는 이 책이 2·28의 국제화에 초석이 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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