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수상-단편소설 '변방을 위하여' 김준현
드넓은 하늘에선 스산한 바람만이 불었다. 칠흑과 같은 침묵만이 공기가 되어 콧속을 드나들었다. 햇볕은 따뜻해졌으나 여전히 소름이 온몸을 휘감는 갑진년(524년) 정월 15일 이었다.
"시행 하라."
모즉지(牟卽智) 매금왕(寐錦王)의 목소리가 산천에 울려 퍼졌다. 자신의 운명을 아는 듯한 얼룩소는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투명한 눈망울에선 피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탁부(喙部)의 내사지 나마가 앞으로 나갔다. 들고 있는 시퍼런 칼날에선 하늘에 비친 구름만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곧 이어 구름은 찐득한 피로 엉기었다. 바닥에선 좀 전까지 이승의 끈을 붙잡으려던 소의 머리만 뒹굴었다. 뒤에서 서있던 사탁부(沙喙部)의 일등지 나마가 함께 칼을 들고 나아갔다. 내사지 나마와 함께 소의 배를 갈랐다. 암홍색의 피들이 그들이 입은 비단을 물들여 갔으나, 그들은 전혀 아랑곳 하지 않은 채 내장들을 꺼냈다. 내장들을 꺼내며 준비된 14개의 잔에 정성스레 소의 피를 담았다. 매금왕과 그의 동생을 비롯한 14인 앞에 잔이 놓였다. 매금왕이 먼저 잔을 들었다. 동생인 사부지(徙夫知) 갈문왕(葛文王)이 따라 들었다. 뒤이어 모든 신하들이 잔을 들었다. 매금왕이 단숨에 잔을 비웠다. 이후 엄중하지만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만약 이 같은 일을 다시 벌이는 자는 하늘에서 죄를 얻으리라!"
모든 신하들이 잔을 비웠다. 단 한명만 제외하고.
매금왕의 옆에 있던 갈문왕이 상념에 잠긴 채 손에 든 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매금왕은 옆에 앉은 갈문왕을 노려보았다. 몇 초 뒤 정신을 차린 갈문왕은 형인 매금왕의 시선을 마주 했다. 가히 한 나라를 통치할 수 있는 오뉴월의 뜨거운 태양과도 같은 눈빛 이었다. 갈문왕은 형의 눈빛에 빙긋이 웃으며 들고 있는 잔을 비웠다. 매금왕은 배알에서부터 속이 꼬이며 욕지기가 올라 왔다.
'저 놈이 기어코….'
속을 좀처럼 알 수 없는 동생의 투명한 눈빛 속엔 날카로운 칼이 숨겨져 있었다. 누구든지 죽일 수 있는 예리함 이었다. 매금왕은 신하들의 인사를 받을 틈도 없이 발걸음을 옮겨 제사장을 빠져나갔다. 뒷목에선 서늘한 시선이 느껴졌다. 마치 작은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 간지러우면서도 불쾌한 느낌이었다. 그 불쾌함은 일이 조금만 틀어졌었더라면 바닥에 뒹굴고 있는 것은 자신의 목이 될 수도 있었다는 두려움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약간의 현기증이 일어났다.
현기증을 이겨보고자 허벅지에 힘을 더 주어 걸었다. 그 바람에 바닥에선 쿵쿵 거리는 소리가 났다.
'왕은 단 한 순간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매금왕은 자신의 아버지 지증왕이 살아계실 적 했던 목소리를 떠올렸다. 이내 중심을 다시 잡고 꼿꼿하고 힘찬 자세로 걸어 나갔다. 왕의 용포가 힘찬 기운에 부풀어 펄럭였다가 이내 잠잠해 졌다.
- 흐르지 않는 물
갈문왕은 본디 속을 잘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늘 책을 가까이하여 지식이 깊은 듯하였으나 좀 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 한 사안에 대하여 오랜 시간 숙고하였다. 평소엔 조용히 있으나 한 번 씩 나오는 그의 알 수 없는 행동은 아버지 지증왕을 비롯한 신하들을 놀라게 하였다. 숙고한 생각 끝에 이른 행동은 좋은 쪽도 있었으나 나쁜 쪽으로 이를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왕위를 물려주려고 할 때 지증왕은 시름에 잠겼다. 지증왕은 동생의 능력이 형보다 뛰어난 것은 알고 있었으나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왕이 생각을 비춰주지 않으면서 자기만의 행동을 하게 되면 신하들이 먼저 혼란에 빠지며 궁극적으로는 백성들이 고통을 받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지증왕은 성품이 올바르며 곧은 형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된다.
매금왕의 즉위 후 매금왕과 갈문왕은 번번이 부딪혔다. 갈문왕은 기존 귀족 6부 체제를 옹호하였으나 매금왕은 6부를 약화 시키고 왕권 강화를 위해 힘썼다.
'물은 한 곳에 오랫동안 모이면 썩는다.'
갈문왕이 좋아하던 말이었다. 권한이 한명에게 집중적으로 모이면 그 권한을 가진 자는 반드시 썩게 된다. 사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제도의 문제였다. 그는 한곳에 힘에 집중을 하는 것 보다 6부의 회의를 통해서 결정을 하는 정치를 더 옳은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매금왕은 갈문왕이 눈엣 가시였다. 허나 6부 귀족 체제에서 정치적 지지를 받는 갈문왕을 함부로 할 수가 없었다. 둘의 사이는 곪고 곪아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 누런 고름이 언제, 어디서 터져버릴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뜻밖에 신라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거벌모라(居伐毛羅, 지금의 울진)에서 불씨가 지펴진다.
갈문왕은 이복 여동생이 있었다. 그녀는 어사추여랑(於史鄒女郎)으로 갈문왕이 특히 어여삐 여겼다. 매(妹)의 감정을 넘어 둘은 연인 관계였다. 여동생은 기골이 장대한 형제와 달리 유약하였다. 몸은 약했으나 일찍이 서책을 접하여 지혜가 깊었고, 미모가 빼어났다. 갈문왕과 어사추여랑은 신라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풍류를 즐기곤 하였다. 이번에도 그런 일환의 행차였다. 동쪽 바닷가를 따라 고구려와 국경인 실직(悉直, 지금의 삼척)까지 갔다가 돌아올 계획을 세웠다.
갈문왕과 어사추여랑은 거벌모라까지 들렸을때, 이곳에서 반란 준비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규모를 보아 수천 명은 넘을 것이 분명했다. 갈문왕은 서라벌에서 군사가 반드시 와야 함을 짐작 하였다. 그리고 몇 수 앞을 머릿속으로 빠르게 셈 해보았다. 왕실의 대군이 이곳으로 파견 되면 도읍은 비게 된다. 자신의 군사로 서라벌을 장악한다..... 갈문왕은 서라벌과 가장 먼 변방에서 신라의 고인 물을 버리고 다시 흐르게 하겠다는 원대한 꿈을 가졌다.
1) 모즉지(牟卽智) 매금왕(寐錦王) : 신라의 23대 왕 법흥왕이다. 모즉지는 이름이며, 매금왕은 호칭을 말한다. 이 시기에 왕의 칭호로 매금을 사용하였다.
2) 탁부(喙部) 내사지 나마 : 탁부는 신라의 귀족 합의체 6부중 한 세력을 말하며, 내사지는 이름이며 나마는 관등명이다. 탁부는 매금왕의 지지기반이었다.
3) 사탁부(沙喙部) : 6부의 한 세력이며, 사부지 갈문왕의 지지기반이었다.
4) 사부지(徙夫知) 갈문왕(葛文王) : 법흥왕의 동생이다. 왕위계승을 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갈문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5) 신라시대에 나라에서 중요한 일을 결정하고 난 뒤 얼룩소를 죽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6) 어사추여랑(於史鄒女郎) : 여랑은 여자 왕족에게 붙이는 칭호이다. 어사추에 대한 해석은 어사추를 이름이라고 보는 의견, 어사추라는 사람의 딸 이라고 보는 의견이 있다. 울주천전리각석에서 갈문왕과 사랑하는 누이(友妹)라는 관계로 설명되고 있다.
7) 신라시대에서는 왕실의 근친혼이 매우 성행하였다.
댓글 많은 뉴스
윤석열 '탄핵소추안' 초안 공개…조국 "尹 정권 조기 종식"
尹 회견때 무슨 사과인지 묻는 기자에 대통령실 "무례하다"
"촉법인데 어쩌라고"…초등생 폭행하고 담배로 지진 중학생들
이재명 사면초가 속…'고양이와 뽀뽀' 사진 올린 문재인
유승민 "이재명 유죄, 국민이 尹 부부는 떳떳하냐 묻는다…정신 차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