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수상-단편소설 '변방을 위하여' 김준현
- 변방의 작은 불씨
숨이 턱턱 막히는 계묘년(523년) 여름이었다. 거벌모라의 니모리는 농사를 하다 말고 낫과 농기구들을 옆으로 던져 버렸다.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자기가 먹을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니모리는 신라 왕실의 거벌모라 정책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사실 이전까지 니모리는 나라 일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벌모라는 항상 주인이 몇 번이고 뒤바뀌는 곳이었다. 니모리의 할아버지 때만 하더라도, 이 지역은 우진야로 불리었던 고구려 땅이었다. 몇 년 전 신라가 백제, 가야의 원군을 얻어 고구려를 물리치고 난 뒤 지금의 신라에 속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거벌모라 사람들은 나라에 대해서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 거벌모라라고 부르든, 우진야라고 부르든 상관없었다. 다만 밥을 배불리 먹고, 내 새끼들을 따뜻하게 키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그러나 이번에 신라왕은 달랐다.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노인(奴人)의 신세에서 벗어나게 해주었다. 이제 이쪽저쪽에도 속하지 못하지 못하는 변방의 떠돌이를 정리할 수 있을까 하였다. 이제 한번 잘 살아 보자! 라는 기대감으로 모든 마을은 들떠 있었다.
하지만 노인(奴人)에서 벗어난 그들 앞엔 더 가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라벌에서 온 거벌모라 도사는 왕경인과 지방민에 대한 압도적 차별 정책을 펼쳤다. 그들의 관리는 노인법(奴人法) 적용 받을 때보다 더 가혹하게 쌀과 곡식을 거두어 갔으며, 지방민은 사람 취급 받지 못하였다. 길가의 아이들은 배와 등이 붙은 채 떨어진 곡식을 주워 먹었으며, 갓난아기들은 울음조차 메말라 버렸다. 심지어 산골에서는 길가는 사람들을 잡아먹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반면에 거벌모라 도사(道使)가 있는 이야은성에서는 매일 술판이 벌어지고 여인들이 헐벗고 지내며, 썩어가는 고기가 하루에도 수 십 근은 된다는 소식이 들렸다.
니모리는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다. 굶어 죽든, 반란을 일으켜 죽든 매 한가지라고 생각되었으므로 죽기 전에 발악 한번 해보자는 심산이었다. 먼저 남미지촌의 익사와 어근즉리를 만났다. 그들 또한 자신과 같은 심정이었으므로 뜻을 함께 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익사와 어근즉리는 주변에서 힘을 쓸 줄 아는 젊은 사람들을 모았다. 이어 니모리는 갈시조촌에서 나등리, 아대혜촌의 나이리를 만나 설득하였다. 니모리가 아대혜촌, 갈시조촌, 남미지촌을 돌아다니는 사이 거벌모라에선 미의지와, 탄지사리가 힘을 합쳐 사람들을 모았다. 그 수를 세니 어림잡아 몇 천은 되었다.
이렇게 사람을 모았으나 니모리에게는 하나의 근심이 있었다. 이야은성은 길이 좁고 오르막이 험한 곳에 있어 공략하기 어려울뿐만 아니라, 높은 성벽 탓에 어디 쪽으로 공략해야 할지 막막하였다. 니모리는 며칠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엉뚱한 곳에서 실마리가 풀렸다. 촌민들을 훈련하고 대열을 정비하던 어느 날 왕경인으로 보일법한 남녀가 그를 찾아 왔다.
니모리는 느닷없는 왕경인의 방문에 경계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밀스레 준비한다고는 하였는데, 서라벌까지 벌써 소식이 닿았구나! 생각하며 속으로 아찔하였다. 그러나 아찔한 생각은 의문으로 바뀌었다. 소식이 닿았다면 군사가 왔거나, 항복을 권유하는 신하가 왔어야 하는데, 눈앞의 두 사람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8척 장신에 골격이 크게 발달해 있었다. 코는 오똑하게 높게 서 있었으며 특징적인 것은 바로 눈 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이었다.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헤아릴 수 없는 호수에 끝없이 잠길 것만 같은 눈이었다. 옆의 여인은 얼굴을 가리고 있어 잘 보이지 않았으나, 얼핏 보아도 미인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왕경인 이신 것 같은데, 저는 왕경인에 반란을 품고 있는 사람입니다."
니모리는 처음부터 돌려 말하는 것 없이 모든 패를 드러내었다. 어설프게 기 싸움을 해서 남자의 깊은 속셈에 빠져 드는 것보다 처음부터 강하게 부딪히는 쪽을 택했다.
남자는 니모리의 대답을 예상이라도 한 듯, 흔들리지 않고 말했다.
"말씀하신대로 저는 왕경인 입니다. 당신의 뜻은 시작한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뜻을 도와드리고자 이 자리에 온 것입니다."
니모리는 어처구니가 없는 말에 화가 났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당신이 왜 우리를 돕는 것이며, 어떻게 도와줄 수 있다는 말 입니까? 왕경인이 우리를 진심으로 돕는 것이라면 우리에게 쌀과 곡식을 덜 가져가고, 우리의 피 고름을 빨아먹는 거벌모라 도사(道使)를 처형하여 주시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남자는 니모리의 흥분된 목소리에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저 또한 거벌모라 도사(道使)가 포악한 정치를 일삼는 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일은 한 사람이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매금왕과 6부의 회의를 통해야만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서라벌의 일 처리는 걸리는 기간이 길고 복잡합니다. 그 복잡함은 언제나 시간이 걸리고 그 시간 동안 백성들은 고통 받겠지요. 저는 그 시간을 단축하고자 이렇게 온 것입니다."
짐짓 점잖은 목소리와 진실성 있는 그 말에 니모리는 주춤하였다. 남자의 두 눈은 확신에 찬 듯 보였으나 여전히 속은 알 수 없었다. 속는 셈 치더라도 그 깊은 호수 속에 빠져 보자는 심산으로 물었다.
"당신이 우리를 어떻게 도와줄 것입니까?"
"곤란한 문제가 이야은성의 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야은성과 주변의 지도를 드리겠습니다. 이야은성 주변은 산세가 험악해 지리를 알지 못하면 몇 개월이 걸려도 함락하지 못하는 곳입니다. 성안 사람들은 이를 알고 여러 비밀 샛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길로 통하시면 단숨에 성을 함락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자는 품 안에서 지도를 꺼내어 니모리에 앞에 두었다. 지도를 받아보자 이야은성의 내부가 훤히 눈에 보였다. 주변의 샛길을 비롯하여 물자 수송 통로, 군사의 배치도, 심지어 몇 명까지 배치되어있는지 상세히 나와 있었다.
8) 노인(奴人) : 정복을 당한 계층, 노예 계층을 말한다.
9) 서라벌 : 신라의 수도인 경주를 말한다.
10) 왕경인 : 신라 수도인 경주에 사는 사람으로 골품을 가진 사람들을 말한다.
11) 도사(道使) ;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을 말한다.
12) 갈시조촌, 아대혜촌, 남미지촌 : 모두 울진지역의 촌 지역들이라고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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