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 불신(不信)이 더 무섭다

유재경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 영성학 교수

유재경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 영성학 교수
유재경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 영성학 교수

신뢰는 조직과 관계, 문화의 바탕이다. 신뢰는 종종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와 국가를 평가하는 기준으로 작용한다. 오래전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한 나라의 경쟁력은 그 나라가 고유하게 갖고 있는 신뢰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고 했다. 그의 말은 신뢰가 높은 사회는 선진국이고, 신뢰가 낮은 사회는 후진국이라는 논리로 귀결되었다. 신뢰의 정도에 따라 한 나라의 품격과 국력이 결정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신뢰의 유무(有無)는 단지 국력에 제한되지 않는다. 신뢰의 유무에 따라 한 나라가 서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한다. 『논어』 '안연편'에서 공자는 자공(子貢)이 정치에 대해 물었을 때 이렇게 답했다. "정치는 백성을 배불리 먹이고,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백성들에게 믿음을 얻는 것이다." 자공이 다시 물었다. "어쩔 수 없이 그중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합니까?" 공자는 대답했다. "국방을 포기하라." 다시 자공이 묻는다. "식량과 신뢰,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합니까?" 그때 공자는 식량을 포기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공자는 "예로부터 사람이 모두 죽음을 피할 수 없지만, 백성의 믿음이 없이는 (나라가) 서지 못한다"(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는 말을 한다. 신뢰가 없으면 나라도 설 수 없다는 것이다.

코로나19 확진자가 하루에 500명 이상씩 무더기로 쏟아지고 있다. 대구경북 지역은 통제하기 어려운 '팬데믹'(대유행) 상황에 직면했다. 코로나19는 대구 시민과 경북 도민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을 두려움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사실 감염병은 아퀴레이리병처럼 뜬금없이 나타났다 얼마 동안 잠잠하다가 다시 다른 곳에 출현한다. 일부 감염병은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는 자취를 감추기도 한다. 그래서 빌 브리이슨은 『바디: 우리 몸 안에서』에서 "감염병은 기묘하다"고까지 했다. 감염병 발생은 피할 수 없는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사회와 국가가 감염병을 예방하고, 관리, 치료하는 방식에 따라 결과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환자가 의사를 믿지 못하면 어떻게 치료를 받을 수 있겠는가. 부부가 서로 믿지 못하고, 부모와 자식 사이에 신뢰가 없다면 어떻게 가정이 설 수 있겠는가. 가정이든 국가든 신뢰가 없으면 바로 설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국가를 신뢰하고, 대통령의 말을 믿고 일상으로 돌아갔던 수천 명의 시민들이 코로나19 확진자가 되었다. 신천지 신도임을 밝히지 않은 의료인 때문에 수많은 동료 의료인들이 자가 격리되고, 공무원이 신천지 신도임을 밝히지 않아 군청이 폐쇄되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다. 코로나19도 무섭지만 더 무서운 것은 불신이다.

최근 들어 '신뢰'에 대한 논의가 사회학계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다. 왜 그럴까? 신뢰는 한 사회를 세우는 근원적 '사회적 자본'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신뢰는 국가와 사회의 존립을 넘어 인간의 궁극적 가치를 추구하는 종교의 본질이다. 그래서 신앙을 신뢰의 가장 소박한 존재 방식이라고 한다. 국가와 가정은 물론이고 종교는 더더욱 믿음에서 시작되고, 믿음을 통해 자라고, 믿음 안에서 완성된다. 성경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히 11:6)라고 했다. 이러할진대 신뢰가 없는 종교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신뢰 없는 사회도 두렵지만, 더 무서운 것은 신뢰 없는 종교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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