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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숙의 옛그림 예찬]최북(1720-?), '괴석'

미술사 연구자

종이에 담채, 28.5×33.6㎝,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소장
종이에 담채, 28.5×33.6㎝,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소장

'괴석(怪石)'에는 '칠칠(七七)' 인장 하나만 찍혀있다. 호생관(毫生館) 최북의 자(字)를 새긴 인장이다. 최북은 이름과 호와 자가 흥미로운 화가다. 원래 이름은 식(埴))이고 자는 성기(聖器)였다. 스스로 북(北)으로 개명하고 북을 둘로 쪼개 파자(破字) 해 자를 칠칠이라고 했다. 최북의 시를 보면 서울 출신인 그가 북방 변경에서 수년간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는데, 북은 '북녘, 북쪽으로 가다, 도망치다'라는 뜻이어서 북쪽에서 살았던 일과 세상에서 도망치고 싶은 심정을 이름으로 나타낸 것 같다.

칠칠은 못난이, 바보 외에 다른 뜻도 있다. 당나라 때 도사(道士) 은천상이 스스로 '칠칠'이라고 해 은칠칠로 불렸다는 이야기가 북송 때 책인 『태평광기』(978년)에 나오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글 번역본이 나올 만큼 조선에서도 애독되었다. 은천상은 가을에 두견화를 피우는 환술(幻術)을 부렸다고 한다. 두견화는 진달래꽃이다. 최북과 교유한 혜환 이용휴는 「제풍악도(題楓嶽圖)」에서 "은칠칠은 때가 아닌데도 꽃을 피웠고, 최칠칠은 흙이 없는데도 산을 만들어냈다. 모두 순식간의 일이니 기이하다."라고 최북의 금강산그림을 보고 감탄한 글을 지었다.

호생관은 만년에 지은 호인데 사람들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면 '오이호단작생애야(吾以毫端作生涯也)', 곧 "내가 붓끝으로 살아가기 때문이오."라고 대꾸했다고 정조 때 의관(醫官)으로 대수장가였던 석농 김광국이 『석농화원(石農畵苑)』에 기록해 놓았다.

호생은 "생계가 붓에 달려있다"고 해석하면 그림 그리는 것이 호구지책이라는 자조적 의미가 되고, "붓으로 먹고 산다"고 보면 화업(畵業)을 전문직으로 여긴 화가의 자긍심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호생관은 중국에서 사용된 전례가 있다. 명나라 때 화가 정운붕에게 동기창이 호생관이라는 인장을 선물했는데, 정운붕은 이 인장을 득의작에만 찍었다고 한다. 이때 호생은 "붓으로 창조한다.", "붓이 생동한다."는 의미이다. 최북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최북이 활용한 화보(畵譜) 중 하나인 『당시화보』 밑그림을 정운붕이 그렸기 때문이다. 무슨 뜻이냐고 물어 보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특이한 호였던 것을 보면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면서 자신의 자부심을 담아 호생관을 사용한 것 같다.

호생과 칠칠은 둘 다 중국 고전과 연관되면서 의미가 교묘하게 겹쳐지는데, 최북이 이 이름을 냉소로 비틀어 활용할 만큼 지적 교양이 있는 인물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래서 문인 층의 독특한 애호물인 괴석을 그림으로 그렸나 보다. 풀이 잔잔하게 나있는 지면 위에 커다란 구멍이 여기 저기 뚫린 괴상한 돌 한 덩어리가 꽃 인양 땅에 심어져 있다. 돌덩어리를 하나의 미적 대상으로 여기는 심미의식은 문인 문화의 심화와 함께 19세기에 이르면 조선 화단에 '괴석화'를 하나의 장르로 성립시킨다. 최북의 '괴석'은 그런 취향을 선구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미술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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