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국인 이야기](https://www.imaeil.com/photos/2020/03/10/2020031018362217863_s.jpg)
비평가이면서 학자, 언론인, 소설가, 시인, 행정가, 문화 기획자 등 다채롭고 화려한 이력의 소유자이자 우리시대의 대표적 지성으로 불리는 이어령 선생이 무려 10년의 산고 끝에 '한국인 이야기'를 출판했다.
저자는 희수(喜壽, 77세)이던 2009년 시작해 올해 미수(米壽, 88세)를 맞아 마침내 한국인 이야기를 완성하면서, 그 모든 화려한 직함과 수사를 뒤로 하고 스스로 '이야기꾼'으로 남고자 했다. 그동안 무리한 집필로 머리 수술을 받았고, 암 선고를 받아 또 두 차례 큰 수술을 감당해야 했다. 어쩌면 생의 말년에 이르러 모든 역량을 이 책의 저술에 쏟아부은 셈이다.
저자가 이야기꾼이 되고 이야기꾼으로 남고자 하는 것은 이야기야말로 천년만년 이어온 생명줄처럼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는 비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사도 이론도 아니며, 우리의 생명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형성되고 계승되어온 '문화 유전자'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인은 정말 독특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겨우 70년 만에 새로 태어난 신생국 중에서 유일하게 세계경제 10위권에 진입하며 선진국 문턱에 들어섰다. 한류 열풍이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가더니 마침내 방탄소년단(BTS)은 비틀즈와 어깨를 겨룰 정도로 글로벌 팬덤을 이끌고, 영화 '기생충'은 넘사벽으로 여겨졌던 아카데미상을 휩쓸었다. 문화야말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흐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저자는 채집형 한국 문화가 한류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한류의 원천을 수렵채집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사실이다. 지난 70년 간 한국인의 변화는 수십만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누이가 나물캐러 다니던 채집 시대의 아이가 농경, 산업, 지식정보 시대를 거쳐 우리 손으로 개를 복제하는 바이오 시대의 전 문명 과정을 보고 겪었다. 그 뿐이 아니다. 큰 전쟁을 두 번씩이나 겪고 혁명을 서너 번 치르며 블랙홀 같은 소용돌이를 횡단한 사람들의 '집단기억' 이야기를 어디에서 들어볼 수 있을까.
또한 이 거대한 블랙홀의 소용돌이는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나라를 만들어 가고 있는 문재인 정부'와 중국 우한발 코로나19 사태 등으로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전 세계가 감탄하는 성과를 이루고도 이를 스스로 부정하고 파괴하는 한국인, 그러면서도 위기를 맞으면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한국인, 그들은 대체 누구일까?
중국 우한발 코로나19의 걷잡을 수 없는 확산으로 공포와 공황 상태에 빠져든 이탈리아와 달리, 무려 5천 명이 넘는 확진자가 한 도시에서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악물고 차분하고 단단하게 대처하고 있는 대구시민의 모습을 비교해 볼 때, 한국인의 정체에 대해 또 다시 질문을 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한국인으로 되어가는 것이며, 한국인은 완성된 고정관념이 아니라 생성해가는 어쩌면 영원히 완결될 수 없는 개념일지도 모른다. '한국'이라는 호칭이 1897년 12월 2일자 독립신문에 처음 등장하고, 1923년 춘원 이광수의 동아일보 연재 소설 '선도자'에 잠시 '한국사람'이 등장할 뿐, '한국사람'이라는 명칭은 '대한민국'이라는 신생국이 성립한 1949년부터 본격 사용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인은 100년도 안된 한국인 그러면서도 선사시대 이전의 수백만년 전 채집인으로서의 한국인이라는 특성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한국인의 '탄생' 이야기를 꼬부랑 할머니의 열두 고개 구조로 펼쳐놓는다. ▷태명 고개: 생명의 문을 여는 암호 ▷배내 고개: 어머니의 몸 안에 바다가 있었네 ▷출산 고개: 이 황홀한 고통 ▷삼신 고개: 생명의 손도장을 찍은 여신 ▷기저귀 고개: 하나의 천이 만들어 낸 두 문명 ▷어부바 고개: 업고 업히는 세상 이야기 ▷옹알이 고개: 배냇말을 하는 우주인 ▷돌잡이 고개: 돌잡이는 꿈잡이 ▷세 살 고개: 공자님의 삼 년 이야기 ▷나들이 고개: 집을 나가야 크는 아이 ▷호미 고개: 호미냐 도끼냐, 어디로 가나▷이야기 고개: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등. 한 고개 한 고개를 넘을 때마다 채집시대부터 이어져온 한국인의 문화 유전자 속에 담겨 있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했던 생명 기억과 그 무한한 시원의 에너지를 만날 수 있다.
이사벨라 비숍(1831~1904)은 한국을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한국인들이 이 세계에서 가장 열등한 민족이 아닌가 의심했다. 그리고 그들의 상황을 가망 없는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 (러시아 자치구 프리모르스키 이주 한국인을 본 뒤) 같은 한국인인데도 정부의 간섭을 떠나 자치적으로 마을을 운영해가는 그 곳 이주민들은 달랐다. 의심과 게으름과 쓸데없는 자부심, 그리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 대한 노예 근성은 어느새 주체성과 독립심으로 바뀌었고…고국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도 정직한 정부 밑에서 그들의 생계를 보호받을 수 있게 된다면 참된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한국인의 관점에서 볼 때도 예리한 분석이 아닐 수 없다. 남과 북의 차이에서 볼 수 있듯이 한국인의 성장과 발전은 '어떤 지도자' '어떤 정부'를 갖느냐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먼저 이 책을 통해 한국인 우리 스스로를 제대로 알고 난 뒤, 한국인의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풀어낼 지도자를 선택하는 지혜를 키워야 할 것 같다. 432쪽, 1만9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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