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북돋움] 모모모모모, 내기내기내기

푸념 그만 사회에 보탬 되는 행동
일상의 소중함 깨닫는 시간 되길

김은아 그림책 칼럼니스트

프리지어 한 다발을 양손에 모아 쥐고 가는 한 아이를 보고서야 봄이 왔음을 알아차렸다. 열두세 살쯤 되었을까. 꽃향기를 살짝 살짝 맡으며 걷는 모습이 예뻐서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올해는 봄꽃을 본들 감탄사가 나올까 싶었는데 역시 돌아온 계절은 반갑다. '그래, 봄이 무슨 잘못이람.'

코로나와 싸우고 있는 이들에게 미안해서 환한 표정 짓는 일, 큰 소리로 웃는 일을 멈췄다. 남을 먼저 보는 사람들, 남을 먼저 돌봐야 하는 사람들에게 진 빚이 쌓여간다. 그들을 응원하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호들갑 떨지 않고 치우친 정보에 휩쓸리지 않고 불필요한 말을 줄이고 무던하게 지낸다.

얼마 전, 서울에 있는 출판사 편집장한테서 연락이 왔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대구 사람들 말 안 듣는 꼴통이라고, 사투리도 듣기 싫다는 댓글에 씁쓸했다는 나의 말에 "아니, 그런 걸 왜 봐요? 보지 마세요. 사람이 사람을 거부하기 시작하면 세상은 끝나는 거예요. 저는 변함없이 대구를 사랑합니다"라고 하는데 그 말이 참 고마웠다.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힘든 처지에 있는 지인의 아이들에게 그림책 보내기를 시작했다. 대구를 응원해 주는 이들에게도 작은 선물을 보낸다. 공방을 운영하는 지인에게 주문한 컵 받침인데 이유를 설명했더니 더 정성껏 만들어줬다.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서로의 안전을 지키면서 움직이고 있다.

연예인들의 기부금, 기업체와 여러 단체의 사회적 참여에 비하면 너무도 작지만 나만의 방식으로 마음의 방역을 시작한 셈이다. 각자의 형편에 맞게 마음을 내는 사람들이 많다. "힘들다, 어렵다, 죽겠다" 앓는 소리를 하고 나면 벼랑 끝에 선 사람들이 보이는데 이제 푸념은 그만하고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해야 되지 않겠냐며 행동으로 옮기는 이들이다.

어느 날에는 미국 배우 메릴 스트립이 제74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했던 수상 소감이 떠올랐다. "한 번은 촬영을 하던 중에 무언가에 대해 불평을 했던 적이 있어요. 아마 저녁을 거르고 일을 했던가, 촬영이 길어졌던가 했었을 때 토미 리 존스가 이렇게 말하더군요. '메릴, 배우로 산다는 건 특권이지 않아?' 맞아요. 그래서 우리는 공감의 연기를 할 수 있는 특권과 책임에 대해 서로에게 계속 일깨워 줘야 해요."

불평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직업이 무엇이건,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든 특권을 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면서 불평하고 있는지 한 번쯤은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소감 말미에서 메릴 스트립은 부서진 마음을 예술로 승화시키자고 말했다.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그 어떤 고난과 위기 속에서도 예술은 단절되지 않았고 혼이 담긴 작품들은 치유의 힘을 발휘했다. 그림책도 예술이다. 마음이 심란해서 책을 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그림책을 펼쳐 보기 바란다. 다가온 봄을 심리적으로 막는 데 실패하고 나니 책꽂이에서 뽑아 든 그림책의 시작도 봄을 알린다.

'모모모모모'(향 펴냄). 제목이 독특하다. 윷놀이에서의 모가 아닌 모내기의 모이다. 봄이 되자 농부가 논에 모를 심는다. '모모모모모 내기내기내기 벼피벼피벼피 피뽑피뽑피 벼벼벼벼벼…뼈뼈뼈뼈뼈 벼벼벼벼벼벼…벼볍벼볍벼 지지벼벼 지지벼벼 벼벼벼벼벼 탈탈탈탈탈 쌀쌀쌀쌀쌀 짚짚짚짚짚 욤욤욤욤욤 냠냠냠냠냠 잘 먹겠습니다.'

글이 왜 이런가 싶지만 그림과 함께 보면 작가의 재치에 무릎을 치게 된다. 농부가 심은 모가 자라 여름을 견디고 바람에 넘어지고 일으켜 세우고 황금빛으로 익어 쌀이 되어 우리의 밥상에 올라오기까지의 과정을 경쾌하게 담아냈다. 혼자 읽어도 재미있고 누군가에게 소리 내어 읽어주면 즐거움이 배가 되는 책이다. "다 먹었다 방심 말고 남은 밥 톨 떼어 먹자." 뒤표지에 적힌 표어 같은 문구는 농부에 대한 고마움, 쌀 한 톨의 소중함을 얘기한다.

김은아 그림책 칼럼니스트

지금 우리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나고 있지만 그동안 당연하게 여기고 누렸던 일상의 가치를 깨닫는 중이다. 마음껏 들이켰던 공기, 자유로운 걷기, 차 한잔의 여유, 그리고 놀이, 학교, 직장, 일, 가족, 사람에 대한 고마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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