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의 아담한 사진관을 떠올려 보자. 돌 사진부터 영정 사진까지. 사람의 인생을 묵묵히 지켜봐 주는 애틋한 곳. 동네 사진관은 그런 장소였다. 하지만 디지털기술이 발달하며 사진관은 예전만 못하다. 마을 어귀 커다란 진열장 너머 가족사진과 돌사진이 걸려 있던 풍경은 다시는 보기 힘든 지난 세월의 풍경이 됐다.
"원하는 때에, 손쉽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대에 이런 사진을 찍는 다는 것은 조금 다른 의미가 있다" 사진사 조준형 씨는 대구 남구에서 반려동물 사진관 '루이 103'을 운영하고 있다. 사진이 가진 기억의 힘에 반려동물이라는 숟가락을 슬쩍 올렸을 뿐인데 반려동물을 품에 안은 예약 손님들이 줄을 잇는다.


◆디지털 시대에 오히려 성행하는 사진관
'하나, 둘, 셋' 다음엔 '찰칵'이 튀어나오는 게 인지상정. '원, 투, 쓰리' '이, 얼, 싼' 해외에서도 꽤 통한다고 하니 사진 촬영의 불문율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하지만 동물들이 이 법칙을 알 리 만무하다. 사진기를 들이대면 왠지 더 역동적인 몸짓을 구가한다. 하나에 엉덩이를 들썩이고, 둘에 눈치를 보다, 셋에 저 멀리 도망가 버린다.
"휴대폰에 사진은 넘쳐나는데 정작 액자에 걸 사진은 없다" 루이 103을 찾는 손님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반려동물 사진첩을 보면 대다수가 흔들린 사진, 앵글이 맞지 않는 사진투성이다. "반려인들은 좀 속상하겠지만, 사진 예의라곤 하나 없는 이 녀석들 덕분에 제 가게가 굴러간다." 준형 씨는 동물들의 역동성을 사진에 고스란히 담아내기 위해 노력한다. 분명 가만히 앉아있는 데 움직임이 느껴지는 사진, 흔들리지 않았는데도 활동성이 담긴 사진. 그런 반려동물 사진을 찍고 싶다는 준형 씨의 눈이 반짝 댄다.
특별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방문하는 손님들도 사진관의 인기에 한 몫 한다. "반려동물의 생일, 그리고 새로운 가족이 생겼을 때마다 사진을 찍으러 오는 단골손님이 꽤 된다" 준형 씨는 그런 손님들의 마음을 사진에 꾹꾹 담아내려 노력한다. 촬영 날을 예약하고, 이 날을 위해 준비했을 손님들의 나날들을 카메라를 들기 전 몇 번이고 곱씹는다.


◆촬영 전 동물손님과의 충분한 교감은 필수
이태리에 한 땀 한 땀 자수를 새기는 장인이 있다면 대구엔 한 올 한 올 털을 작업하는 포토샵의 달인이 있다. "인물 사진에서도 촘촘한 머리카락을 보정하기가 제일 힘든데 이 녀석들은 온몸이 머리카락으로 뒤덮여여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털 한 올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 컴퓨터로 빨려 들어갈 듯 구부정한 준형 씨의 어깨 너머 '딱' '딱' 마우스 클릭 소리가 쉴 새 없이 들려온다. 하지만 과한 작업을 거치게 되면 전체적으로 사진이 어색해지기 마련. 보정을 최대한 줄이자는 것이 준형 씨의 철칙이다. 결국 원재료 싸움인 것이다. 원본이 좋아야 결과물이 좋다.
"기자님, 오늘 시간 많으세요?" 촬영 팁을 알려달라 묻자 대뜸 준형 씨가 답한다. 영업 비밀 좀 캐가려고 했더니 웬 뜬금없는 소리인가. 하지만 촬영을 마치고 나니 그 말이 백번 이해가 됐다.
사진관에 오면 머리 몇 번 다듬고 의자에 앉는 사람 손님과 달리 동물 손님은 도착과 동시에 스튜디오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닌다. 냄새도 맡고 마킹도 하고, 짧게는 30분에서 길게는 한두 시간도 소요된다. 준형 씨는 동물들의 그 시간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이곳은 너희에게 안전하고 즐거운 곳이니 걱정 마' 라는 주문을 외우며 동물들과 교감하려 노력한다.
공들여 사진기 앞으로 데려온다고 끝난 게 아니다. 이제부턴 유연함과 간드러지는 목청이 최대 관건이다. 시선을 올려다보면 피로감을 느끼는 반려동물의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준형 씨는 몸을 한껏 낮춘다. 동물 크기가 작을수록 바닥에 점점 붙어 촬영한다는 준형 씨에게서 장인의 냄새가 폴폴 난다. 그러고선 '야옹' '멍멍' 찍찍' 동물 울음소리를 모사한다. "턱 당겨라" "어깨 내려라" "눈 크게 떠라"라며 호통치는 영락없는 사진관 아저씨의 모습이다. "그들의 언어로 건네는 칭찬은 동물들도 춤추게 한다. 예쁘다, 예쁘다 말하다 보면 동물들도 그 말을 알아듣는 건지 사진 결과물이 항상 좋게 나온다"


◆크기도, 표정도, 성격도 다양한 동물 손님들
뭐 마려운 강아지 마냥 스튜디오 이곳저곳을 기웃거린다. 모자며 턱시도며 리본까지, 스튜디오 한 켠 마련된 소품실에서 이것 저것 들었다 놨다를 반복한다. 준형 씨가 유난 떠는 날은 십중팔구 영정사진 예약이 잡힌 날이다. 반려동물이 뭔 영정사진이냐 하겠지만 반려동물 장례산업이 커져가고 있는 시점에 이는 별로 놀랄 일도 아니다. 관절이 안 좋아 도망도 못 가고 가만히 앉아있는 노령견부터 암에 걸려 촬영 중간 약을 챙겨 먹는 투병견까지 저마다 사연은 구구절절하다. 사진을 찍는다는 건 그 순간을 영원히 남긴다는 것. 반려동물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남기고 싶은 반려인들의 예약이 줄을 잇는다. 촬영에 임하는 반려동물을 보며 눈물짓는 반려인에게 준형 씨는 항상 이런 위로의 말을 건넨다. "영정사진 찍으면 장수한다는 말 아시죠? 예쁘게 찍어 드릴 테니 녀석들과 오래오래 행복하세요"
눈물샘을 절로 자극하는 최고령 손님이 있다면, 머리를 쥐어뜯게 하는 최소형 손님도 있다. 바로 햄스터. 털 안 날리고 실례할 일 없으니 고마운 손님 아니냐고 생각했다면 그 생각 고이 접어둬라. 작은 고추가 맵다. 무지 맵다. 케이지에서 꺼내자마자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 모두를 식겁 시키고선 또 반려인 손에 이끌려 원목 스툴에 앉을 땐 순순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카메라 초점을 조절하는 준형 씨 약이라도 올리려는 걸까. 어느샌가 화면 밖으로 쌩~ 하고 이탈해 버린다. 반려인이 챙겨온 먹이를 급여하자 그제서야 사진 찍을 준비가 됐다. 먹이에 정신 팔린 녀석은 '찰칵' 소리에 미동도 없이 그저 해바라기씨를 쥔 손과 이빨만 들썩인다.
동물도 사람처럼 다양한 성격, 다양한 크기, 다양한 표정이 있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그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내 반려동물인 것 마냥 애정이 샘솟는다. "이 일을 몇 년 하다 보니 어느샌가 동물들의 표정을 읽고 있더라. 그저 셔터만 눌러대는 게 아닌, 동물들과의 교감을 통해 최고의 순간을 남기는 사진사가 되고 싶다" 라고 준형 씨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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