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2020 세상 읽기] 그해 봄

대구에도 희망찬 4월의 봄을 맞이할 준비가 돼 있다. 19일 대구 코로나19 지역거점병원인 계명대 대구동산병원에 홍매화가 활짝 핀 가운데 의료진들이 힘찬 발걸음으로 교대 근무를 위해 이동하고 있다. 성일권 기자 sungig@imaeil.com
대구에도 희망찬 4월의 봄을 맞이할 준비가 돼 있다. 19일 대구 코로나19 지역거점병원인 계명대 대구동산병원에 홍매화가 활짝 핀 가운데 의료진들이 힘찬 발걸음으로 교대 근무를 위해 이동하고 있다. 성일권 기자 sungig@imaeil.com

해마다 이맘때면 상춘객이 몰려드는 남도의 봄꽃 축제들이 줄줄이 취소되고 있다한다. 달포 가까이 외출을 삼가는 사이 봄꽃들은 성실하게도 때를 맞춰 피고 지는 모양이다. 불한당처럼 지구촌을 쑥대밭으로 휘정거려 놓는 중국발 '코로나 19' 로 인해 곱다시 봄을 도둑맞은 기분이다. 봄이 왔지만 도무지 봄같지가 않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옛말이 이번만큼 실감나게 와닿는 적도 없다.

애꿎게도 대구경북이 역병의 직격탄을 맞는 바람에 지역민 모두가 큰 고통을 겪고 있다. 심지어 국내에서조차 대구경북 출신이라는 이유로 전염병균 취급받고, 문전박대 당한다는 뉴스를 접할 때면 해외에서 인종차별 받을 때의 기분이 이런건가 싶어 우울해진다. 그나마 국내외 언론들이 우리 지역민의 시민의식에 격려의 박수를 보내오는데서 위로를 받는다. 우리에게 감동과 위안을 주는 사람들도 있다. 감염의 우려 속에서도 생업현장을 떠나 기꺼이 바이러스와의 전쟁 최일선에 나서준 의(義)로운 의병(醫兵)들! 밤낮을 잊고 전쟁터에서 땀흘리는 관계자들! 그리고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위해 전국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마음을 전해오는 선한 사마리아인들!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사회적 거리 두기' 운동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4일 대구도시철도1호선 반월당역 승강장에서 시민들이 간격을 두고 의자에 앉아 전동차를 기다리고 있다. 우태욱 기자 woo@imaeil.com

지금 우리는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경험을 하고 있다. 생소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느라 모두가 자발적 '집콕' '방콕' 생활을 감내하고 있다. 내 경우도 현관 밖으로 나설 때라곤 가끔 지척의 마트에 들리거나 아파트내 짧은 산책로를 운동삼아 걷는게 전부이다.

집안에만 있게 되면서 15년전 타계한 자오쯔양(趙紫陽) 전 중국 공산당 총서기 생각이 자주 난다. 1989년 천안문 사태 당시 민주화 요구 시위대에 온건한 입장이라는 이유로 무력진압을 내세운 리펑(李鵬) 총리 일파에 밀려 축출된 이후 무려 16년간 가택연금생활을 하다 외롭게 세상을 떠난 그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 긴 세월동안 얼마나 바깥이 그립고, 사람의 온기가 기다려졌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 '집콕'도 대수롭잖게 여겨졌다. 한껏 헐렁해진 일상에서 여유를 찾게도 됐다. 신문을 샅샅이 정독하고, 페이지 접어둔 책을 다시 꺼내 읽고, TV 무료 영화를 찾아보고, 겨울옷을 정리하노라면 하루가 쓱쓱 잘 지나간다. 지인들도 "처음엔 갑갑해 미칠 것 같더니 이젠 조금 습관이 된 것 같다"며 전화선 너머로 웃는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역시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이랄까. 만나면 기쁜 사람들과 커피 마시고, 가성비 좋은 식당 찾아가고, 3월의 동해안에서 게를 뜯고, 콘서트에 가고, 강좌를 듣고…. 순식간에 연기처럼 사라진 일상의 조각들이 그리운건 어쩔 수 없다. 그러기에 모두들 SNS를 통해 '조금만 더 버티자'며 서로 응원하고, '행복 송(song)'도 보내주며 다독인다. 그러면서도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평범한 일상이 이토록, 이토록 소중한 줄 몰랐어요!"

영화
영화 '일일시호일'

영화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에서 노리코는 교양을 위해 다도(茶道)를 배운다. 느릿한 차공부가 지겹기도 하지만 그래도 꾸준히 수업에 임하던 어느 날 다실에 걸린 족자의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의미가 마음에 콕 박힌다. '비오는 날엔 빗소리를 듣고, 눈 오는 날에는 눈을 보고, 여름에는 찌는 더위를, 겨울에는 살을 에는 추위를 온몸으로 느끼며 그 순간을 맛본다'는 의미를 깨달으면서 평범한 일상에 감사하게 된다. 세월이 한참 흐른 어느 해 정초, 고령의 다도 스승은 제자들과의 새해 인사 자리에서 온화한 미소로 말한다. "매년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지만 이런 생각이 드네요. 이렇게 같은 일을 반복할 수 있다는건 행복한 일이라고요."

전대미문의 '팬데믹' 사태 속에서 묵직하게 와닿은게 또 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명제 앞에서는 겸허해 질 수 밖에 없다. '코로나19' 기세가 숙지나 했더니 대구에서 2차 집단감염이 이어지고 있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가슴이 또다시 덜컹 내려앉는다. 아직은 끝이 안보이는 터널 안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저 터널 끝으로 환히 햇살이 비쳐들겠지. 그때쯤이면 우리 모두 조금씩은 내적으로 성숙해져 있지 않을까.

코로나19 의심 환자 선별진료가 한창인 26일 대구 서구보건소 선별진료소앞에 노란 산수유꽃이 활짝 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코로나19 의심 환자 선별진료가 한창인 26일 대구 서구보건소 선별진료소앞에 노란 산수유꽃이 활짝 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전경옥 언론인
전경옥 언론인

2020년의 봄은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언젠가 이때를 되돌아 볼 날이 있을게다. 모두들 가벼운 한숨과 함께 말하겠지. 그해 봄은 참으로 힘들었다고, 거리는 텅 비었고, 경제는 멈췄고,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를 두렵게 했다고, 그러나 그럼에도 역경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어난 이웃사랑만은 훈훈했다고….

꽃샘추위가 지나간뒤 아파트 화단의 동백이 더욱 소담스럽다. 명자나무 선홍색 꽃망울도 나날이 부풀고 있다. "이 풍진 세상에도 꽃은 핀답니다!"라고 말해주는 듯 하다.

전경옥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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