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찬란한 예술의 기억] 달구벌 환상곡

임언미 대구문화 편집장
임언미 대구문화 편집장

작곡가 임우상 선생님의 '달구벌 환상곡'을 처음 들은 것은 2000년 여름이었다. 문화예술 잡지 제작을 맡고 얼마 되지 않아, 연주회라는 연주회는 다 찾아다니며 공부할 때였다. 짧은 귀에 곡의 느낌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순 없었지만 '대구의 작곡가가 대구를 노래한 곡'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왠지 모르게 자랑스러웠다.

'달구벌 환상곡'은 합창과 독창이 포함된 3관 편성의 관현악곡으로 대구시립교향악단과 대구시립합창단이 1999년 초연했다. 임우상 선생님은 이 곡으로 1999년 제18회 대한민국작곡상 최우수상을 받았다. 선생님은 대구의 전체적인 인상을 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작품이고, 그만큼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는 곡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 곡은 지난해 대구문화예술회관 팔공홀 재개관 기념 공연 때도 연주됐다.

서양음악이 대구에 처음 도입된 이후, 수많은 음악인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대구가 유네스코 창의도시 네트워크에 음악으로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그렇지만 대구의 근현대 음악인 중 필자에게 가장 가깝게 다가오는 사람은 바로 작곡가 임우상 선생님이다.

1935년생인 임우상 선생님은 2000년 계명대 음대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한 이후, 근래까지 작고 음악인 기념사업, 원로음악가회 활동, 아마추어 합창단 지도 등 대구음악계를 위한 크고 작은 노력을 이어왔다. 향토 출신 작곡가 박태준과 현제명 등을 기리는 사업도 상당수 선생님의 주도로 진행됐다.

'작곡은 작곡자의 정신이 악보로 창조되는 것'이라는 평소의 지론대로 그는 우리 전통 민요나 민속적인 선율을 바탕으로 현대적 작곡 기법을 융화시킨 '향'(鄕) 시리즈로 9개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의 작품을 정리해보면 독주곡 및 실내악곡이 43곡, 관현악곡 4곡, 합창곡 28곡, 가곡 120곡, 환경노래 36곡 등이다.

필자에게 아카이브의 중요성을 처음 일깨워준 사람도 임우상 선생님이었다. 그는 우리 지역에 제대로 된 기록문화가 없다는 사실을 늘 안타까워했다. 특히 2008년에는 선생님이 직접 주도해서 지역 원로 작곡가들의 육성을 녹음했고, 2009년에는 70세 이상 원로음악가 13명의 증언을 비디오 자료로 남겼다. 그들 중 일부는 지금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작업이 더 소중하게 평가된다.

필자가 문화예술 잡지를 만들면서 향토 음악가에 대한 정보가 필요할 때마다 다급하게 수화기를 들어 찾게 되는 사람도 바로 임우상 선생님이다. 그는 그게 어떤 내용이든, 막힘없이, 그리고 객관적으로 답해주시곤 했다. 그러기에 올해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면, 가장 먼저 찾아가 자문과 자료 제공을 부탁드릴 계획이다.

그런데 선생님이 며칠 전 전화를 걸어오셨다. 올해부터 음악 관련 강의와 합창단 지도 등 거의 모든 대외 활동을 그만뒀으며, 연내 거주지를 옮길 계획이니 필요한 자료를 가지고 가라는 것이 통화의 요지였다. 혹시나 건강에 문제가 생기셨나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선생님은 다행히 건강에는 문제가 없으나, 이제 주변을 하나씩 정리해야 할 때라고 말씀하셨다. 아파트 생활을 정리하고 공기 좋고 조용한 곳으로 집을 옮기신다고 했다.

선생님께 올해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 사업에서 반드시 향토 작곡가들의 곡과 음반을 꼭 챙겨서 수집하겠다고 약속드렸다. 코로나19가 좀 잦아들면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리고 전화를 끊었지만 왠지 모르게 한동안 마음 한쪽이 아려왔다. 그리고 캐비닛을 열어 그의 '달구벌 환상곡' 음반을 꺼내 들었다.

관악기와 타악기의 웅장한 선율로 울려 퍼지는 '달구벌 팡파레'로 시작해, 안개 낀 들판의 조용한 분위기를 알리는 제1악장, 그리고 팔공산과 낙동강을 연상시키는 제2악장, 대구의 중심부인 동성로와 약령시장, 그리고 서문시장의 활기가 느껴지는 제3악장, 다시 희망찬 대구의 미래를 노래하는 제4악장….

선생님이 직접 대구의 이곳저곳을 다니며 받은 영감을 토대로 만든 곡답게 역동적이면서도 밝은 도시의 모습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바이러스가 앗아가 버린, 우리가 되찾아야 할 대구의 일상은 '달구벌 환상곡'의 악상처럼 자유롭고 희망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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