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수환 추기경의 대구경북 발자취를 찾아서] ① 신나무골 성지

경북 칠곡군 지천면에 자리한 신나무골 성지. 1800년대 초기 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의 정착촌이자 아킬레 바오르 로베르(김보록) 신부가 경상지역 선교를 위해 전초기지로 삼은 곳이다. 성지 오른쪽에는 이선이(엘리사벳) 순교자의 무덤이 조성돼 있다.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경북 칠곡군 지천면에 자리한 신나무골 성지. 1800년대 초기 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의 정착촌이자 아킬레 바오르 로베르(김보록) 신부가 경상지역 선교를 위해 전초기지로 삼은 곳이다. 성지 오른쪽에는 이선이(엘리사벳) 순교자의 무덤이 조성돼 있다.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한국 가톨릭을 대표하는 고(故) 김수환(1922~2009) 추기경은 일생을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며 민주화와 인권, 사회정의를 위한 버팀목이 되어줬다. 생전 스스로를 '바보'라 부르며 사랑을 실천했던 그는 정치·사회적 고비 때마다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온 우리 사회의 '큰 어른'이기도 했다. 이런 추기경에 대해 젊은층들은 명동성당과 서울대교구장 등의 이미지와 결부시켜 대구경북과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것으로 아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김 추기경은 대구 남산동에서 태어나 경북 군위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대구대교구에서 활동한 대구경북 사람이다. 이에 본지는 김수환 추기경의 대구경북에서의 족적을 살펴보는 연재를 통해 추기경의 사랑과 나눔정신을 되새기는 한편 추기경과 관련된 장소들을 한데 묶어 관광자원화하는 일에도 초석을 제공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신나무골 성지 (2)영남 천주교의 요람 칠곡(한티가는 길) (3)유년의 기억(군위 용대리) (4)신앙의 싹을 기른 고향(김수환 추기경 사랑과 나눔공원) (5)방황하던 신학생 시절(유스티노 소신학교, 성모당) (6)사제의 길에 서다(계산성당) (7)본당 신부 시절의 추억들(안동성당, 김천성당, 대구대교구청) (8)세상과 함께(대구가톨릭시보사)

신나무골에 재현된 영남지역 최초 한옥성당. 아킬레 바오르 로베르(김보록) 신부가 대구 계산동(현 계산성당)에 지은 십자가형 기와집 성당의 역사성을 되살려 대구천주교회 첫 본당터인 이곳에 지난해 5월 복원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신나무골에 재현된 영남지역 최초 한옥성당. 아킬레 바오르 로베르(김보록) 신부가 대구 계산동(현 계산성당)에 지은 십자가형 기와집 성당의 역사성을 되살려 대구천주교회 첫 본당터인 이곳에 지난해 5월 복원했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옹기

김수환 추기경의 호는 '옹기'다. 추기경 시절까지는 호를 쓸 일이 없었다. 은퇴 후 지인들과 함께 장학회를 설립할 때 알려졌다. 장학회 이름에 세례명인 스테파노 대신 옹기를 붙여 자신의 호를 세상에 알렸다. 태어나자마자 조상이 지어 준 이름과는 달리 살면서 스스로 지은 호는 그가 어떤 삶을 바라며 어디서 어떻게 살아 왔는지를 보여준다. 추기경은 많고 많은 이름들 중에서 왜 하필 옹기를 호로 골랐을까.

옹기는 우리 조상들의 일상 곳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쓰였다. 물이나 술을 담는 항아리였으며 소중한 쌀과 간장 된장을 갈무리하는 쌀독, 장독이기도 했다. 떡을 찌거나 콩나물을 키우는 시루로도 썼고 똥오줌을 담으면 똥항, 똥장군이 됐다. 추기경은 생전 사제들에게 "옹기는 곡식뿐만 아니라 오물도 담는 선조들의 삶의 그릇이었다"며 "세상에서 꼭 필요한 옹기 같은 인물이 돼 달라"고 말했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구별하지 않고 똑같이 대하는 사제가 되라는 당부였다. 장학금을 받는 후배 신학생들에게는 "주님 말씀을 질그릇에 담아 전하는 북방선교의 일꾼이 되라"고도 했다.

한국 천주교 초기인 박해시절의 옹기는 집과 논밭을 버리고 산으로 피신한 가톨릭 신자들의 굶주림을 면하게 해주었다. 숨어 다니던 처지에 농사는 아예 엄두도 못 냈다. 대신 옹기나 숯을 구워 양식을 마련했다. 옹기를 짊어지고 이리저리 팔러 다니는 일은 고단했지만 고마운 점도 있었다. 숨죽이고 사는 교우들을 만나도 의심받지 않았고 나라의 단속 소식도 얻어들었다. 50여년 전 발표된 논문에는 '지금 옹기장수나 도공들의 조상은 열이면 여덟아홉은 천주교인'이라는 설문조사 결과가 실리기도 했다. 당시 오래된 옹기 중에는 십자가 등 천주교 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도 적지 않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우리 집안은 할아버지 때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본관이 광산인 조부 보현(요한) 공은 독실한 신자로 1868년 무진박해 당시 충남 논산에서 체포돼 서울에서 순교하셨다. 그 바람에 나의 아버지(김영석 요셉)는 유복자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박해를 피해 다니던 신자들이 그랬듯이 옹기장수로 전전하다 대구 처녀인 어머니(서중화 마르티나)와 결혼해 대구에 정착하게 됐다.' 김수환 추기경은 순교자 집안의 가난한 옹기장수 막내 아들이었다.

칠곡 세븐밸리CC 입구에 설치된 장자동 천주교 신자촌 기념비.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칠곡 세븐밸리CC 입구에 설치된 장자동 천주교 신자촌 기념비.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신나무골 순교자 묘

19세기 초 박해의 파도가 몰아치자 천주교인들은 난리를 피해 살길을 찾아나섰다. 칠곡군 지천면 연화리 신나무골은 예부터 피난지였다. 이곳 사람들은 김대건 신부의 종조부(김종한) 가족들이 신나무골로 이주한 게 천주교인 이주의 시초라고 말한다. 안동에서 붙잡혀 대구감영으로 옮겨진 종조부의 옥바라지를 위해 가족들이 임시 거처를 여기에 마련했다는 것이다. 국채보상운동을 발의한 서상돈의 외조부도 한때 이곳을 피신처로 삼았다. 큰 난리가 난다는 소문이 돌 때마다 신나무골로 숨어들어온 이가 하나둘 늘어났다. 피난 온 천주교인들은 다시 한티나 옹기골 장자동으로 넘어갔다. 장자골은 지금 골프장이 들어섰다.

신나무골 성지 오른쪽 순교자 이선이(엘리사벳) 묘 앞에서 탐방객이 기도하고 있다. 병인박해 때 순교한 그의 묘는 한티에서 그가 살았던 이곳으로 1984년에 이장됐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신나무골 성지 오른쪽 순교자 이선이(엘리사벳) 묘 앞에서 탐방객이 기도하고 있다. 병인박해 때 순교한 그의 묘는 한티에서 그가 살았던 이곳으로 1984년에 이장됐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신나무골 성지 오른편 언덕에 자리한 순교자 묘의 주인 이선이(엘리사벳)도 그랬다. 칠곡 골버실(국우동)에서 농사를 짓다 난리를 피해 신나무골로 피난 온 천주교인이었다. 숨어 온 이들이 늘어나니 소문도 나는 법, 신나무골도 안전하지가 않았다. 이선이의 가족들은 다시 한티로 피했지만 곧바로 붙잡혔다. 시퍼런 칼날 앞에 남편은 이후 천주교를 믿지 않겠다며 믿음을 버렸다. 대신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이선이와 아들은 "죽어도 천주교를 믿겠다"며 작두에 머리를 내밀었다.

대구에서 왔다는 중년의 여인 둘이 묘역 주위를 둘러싼 14처(예수의 마지막 십자가 행로 14자리)조각을 돌며 기도하고 있다. 믿음과 목숨을 바꾼 순교자의 강렬한 마음을 생각해 본다. 아내와 아들을 버리고 살아남은 남편의 슬픔과 부끄러움은 또 얼마나 컸을까. 순교는 피와 죽음을 요구했다. 믿음을 지킨 사람들은 죽음을 피하지 않았다. 내일을 기다리며 지금 이 순간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순교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새롭게 태어남의 희망으로 죽음에의 두려움을 이겨냈다.

순교의 현장에 서면 내 종교가 무엇이냐 따위는 의미가 없다. 종교는 달라도 감동의 울림은 다르지 않다. 순교성지 나들이는 가족과 함께 하는 게 좋다. 철부지 아들 딸 손잡고 거닐기에 제격이다. 아이들의 빈 마음에 감동적인 옛사람의 이야기가 저절로 전해진다. 김수환 추기경은 근 60년만의 고향 나들이 때 주위 사람들에게 이런 농담을 했다. "어머니가 하느님을 잘 믿어야 천국에 간다고 하신 말씀을 나는 천국을 청국(청나라)으로 들었거든요. 기껏 청국에 가려고 하느님을 믿어? 청국은 싫은데, 이런 고민도 했어요." 어린 시절의 기억은 오래도록 남는다.

신나무골 성지 입구에 세워진 김보록 신부 흉상.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신나무골 성지 입구에 세워진 김보록 신부 흉상.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영남지방 전교의 요람

신나무골 성지 앞마당에는 신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골 이름을 두고는 난리를 피해 온 신자와 신부들이 나무 아래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하여 신나무골로 불렸다는 설도 있다. 신나무골은 영남지방 천주교 선교의 교두보였다. 천주교 신앙을 내놓고 밝히지 못하던 시절에도 조선교구 역대 교구장들은 참살의 위험을 무릅쓰고 영남지방까지 전교 선교사를 파견했다.

병인박해 당시 붙잡혀 충청도 보령에서 순교한 조선 5대 교구장 다블리(안돈이) 주교의 일기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이 지방(신나무골)은 매우 작고 의심을 받는 곳으로 20~30명 밖에 성사를 집행할 수 없지만 그래도 큰 읍내(대구)의 작은 핵심이 될 수 있다.' 한반도 남쪽지방 전교에 나선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의 첫 걸음은 이곳 움막에서 비롯됐다.

복원한 초가 사제관. 김보록 신부를 비롯해 선교 사제들이 거처했던 곳이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복원한 초가 사제관. 김보록 신부를 비롯해 선교 사제들이 거처했던 곳이다. 김태형 선임기자 thk@imaeil.com

신나무골 성지 입구에선 아킬레 바오르 로베르(김보록) 신부의 흉상이 방문객을 맞는다. 천주교 대구본당 첫 주임신부다. 박해의 광풍이 지난 뒤 조선을 찾은 그에겐 영남 전교의 사명이 맡겨졌다. 먼저 들어와 살고 있던 신자의 도움을 받아 경상도 첫 사제관을 신나무골에 세웠다. 학당도 열었다. 현재 사제관은 마루와 방 두 칸의 초가집으로 복원돼 있다. 그가 조선교구장 블랑(백규삼) 주교에게 보낸 사목보고서에는 사제관을 세운 사연이 들어 있다. '경상도 신자들은 1년에 한번 순회선교사가 왔다가 훌쩍 떠나가면 버림받고 있다고 느낀다. 그래서 1886년 4월 마침내 경상도 첫 사제관을 신나무골에 두었다.' 대구본당의 출발이었다.

청년이 된 김수환 추기경의 아버지는 옹기나 서양 선교사들이 가져온 학질약 금계랍 장사로 생업을 삼았다. 금계랍 봇짐 메고 대구에 들른 추기경의 아버지를 김보록 신부가 찾았다. 김보록 신부는 추기경의 아버지를 어릴 적부터 돌봐온 터라 사람 됨됨이를 잘 알고 있었다. 추기경의 아버지에게 신심 깊은 처녀를 소개했다. 집안에서 왕대라고 불릴 만치 곧고 듬직했던 처녀였다. 추기경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만남은 이렇게 이뤄졌다.

서영관 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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