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세풍] 대구, 어디로 가는가?

정인열 논설위원
정인열 논설위원

'주인 바뀐 대구, 주인 없는 대구' 그리고 '대구는 어디로 가나?'

1930년 10월, 당시 '별건곤'이라는 잡지는 대구를 다룬 글을 실었다. '운정'이란 필자는 나라를 빼앗겨 일본인에게 주인 자리를 내주면서 '주인 바뀐 대구'와 '주인 없는 대구'의 달라진, 나름 번듯한 거리와 버스 운행 등 서울·평양과 함께 '3대 도시'의 겉모습을 조명했다. 그러면서 쇠락한 상공업과 청년, 학생, 대중이 못 죽어 연명하는 대구의 모습으로 끝을 맺었다.

'앙소생'이란 또 다른 필자는 사통팔달의 도시로 떠오른, '지리상으로 본 대구'와 영남 72개 고을의 중심이자 남인(南人) 지역인, '역사상으로 본 대구' 그리고 일본인에 압도당한 산업 등을 다룬 '숫자상으로 본 대구'를 살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대구 이외에는 나가지 않는' 풍조, 옛 관습의 풍속, 젊은이보다 노인 세력의 강한 영향을 언급하며 '대대구(大大邱)는 장차 어디로 가나? 나는 말할 수 없다'며 비관했다.

90년 전, 일제 핍박으로 절망이던 시절의 대구 옛 모습이다. 두 필자는 대구 겉모습에 분명코 절망했으리라. 감춰진 대구를 보지 못한 탓이다. 하지만 대구는 이미 무기력한 도시가 아니었다. 특히 젊은이가 그랬다. 당시 대구의 두드러진 현상은 젊은이의 드러나지 않는 활동이었다. 필자 말처럼 '노인급 세력이 다른 데보다 훨씬 강한 것'이 아니라 되레 반대였다.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대한광복회 등의 비밀결사 결성, 독립자금 마련을 위한 1916년 대구권총단 사건 등의 주요 인물이 바로 대구의 젊은이였다.

이들 젊은이는 조용히, 그리고 치밀하게 대구의 지도를 바꿀 준비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무엇보다 1919년 3월 만세운동은 대구 젊은이의 응집된 힘을 보여준 의거였고, 이후 대구 젊은이들의 항일 운동의 방향타가 됐다. 3천 명 넘는 시위자 가운데 기소된 102명을 보면 10대 28명, 20대 51명, 30대 14명으로 젊은이가 총 93명이니 전체의 90%다. 이들 뒤를 이어 광복 때까지 대구의 학생과 젊은이의 비밀결사 항일은 이어졌으니, 광복 이후 1960년 민주화를 위한 대구 2·28학생 의거도 같은 맥락이나 다름없다.

이처럼 대구 젊은이들은 암울한 시기, 지역사회의 버팀목 같은 역할을 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 대구의 활력은 떨어지고 침체되면서 마침내 나날이 고향을 등지는 행렬을 이루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배경에는 특히나 정치적인 역동성의 쇠멸과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 대신, 특정한 각종 연(緣)이 지배하고 유연하지 못한 사고의 일당적 지배 흐름의 고착화 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바뀌지 않는 정치색도 문제이지만 주인 행세는 물론, 특정당에 일방적으로 투표하는 바람에 주인 대접조차 받지 못하고 거수기로 전락한 유권자의 행태는 더욱 되돌아볼 폐단이 아닐 수 없다. 나라와 함께 대구만을 바라보고, 유권자에게 충실한 경쟁력 넘치는 후보자들을 대구로 몰리게 하는 일은 제대로 투표를 행사하는 길밖에 없다. 전국 최하위 경제지표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대구를 살릴 후보자를 잘 골라 뽑아 보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번 15일은 그런 면에서 적기이다. 여당과 제1야당이 대구 12곳, 경북 13곳 선거구 모두에 후보를 냈다. 2004년 선거 이후 16년 만에 여야 주요 정당 후보 모두 나섰으니 고르는 선택의 폭은 마련된 셈이다. 당과 사람 모두 보고 뽑자. 특히 대구 젊은 유권자는 그렇다. 유권자가 주인인 대구, 주인 있는 대구는 어디로 갈지 분명할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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