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명령은 오로지 하나다. 왕의 명(命)·령(令)은 지엄하여 반복될 수 없다는 뜻으로 '영조실록', '낙천연보'에 전한다.
조선 21대 영조(1694~1776)는 최장수 83세 왕으로 52년간 재위했다. 탕평책과 균역법, 과거시험의 탕평과를 설치하고 신문고를 부활시켰다. 일본에서 고구마를 들여와 식량 수급에 기여했고, 강화도 외성을 쌓고 조총과 화차를 만들어 국방구축에 힘썼다. 인쇄기술을 개량하여 많은 책을 발행해 백성들이 볼 수 있도록 함으로 문화융성을 이끈 성군이 되었다. 탕평책과 개혁정책으로 조정이 안정기에 접어들 무렵 아들 세자가 붕당을 조장하고 비행과 난행이 고발되었다. 이 고발로 분노한 영조는 아들인 장헌세자를 대적(大敵)을 다루듯 하여 뒤주에 가두는 참상이 벌어졌다.
영조 자신도 당쟁의 고초를 겪었으나 목메어 울부짓는 세자를 가두고도 화가 풀리지 않았다. 참형을 작정하고 대신들과 명현(明賢)들을 불러 모아 세자에 관하여 논의하게 했다. 당쟁의 그림자는 지워지고 왕의 뜻이 확고함을 눈치 챈 대신들은 거스리는 말을 했다가는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몰라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이에 송명흠(1705~1768)이 홀로 반대하고 나섰다.
명흠은 일찍이 촉망받는 인재였는데 왕이 부르는 데도 벼슬에 뜻이 없다며 사화를 피해 학문에만 전력하였다. 그런데 1764년 부호군에 임명되고 찬선(贊善)으로 경영관이 되어 정치적 논의 자리에 있었다.
"전하, 동서고금을 두고 폭군으로 만대의 지탄을 받고 있는 제왕들도 자식을 죽이는 악행만은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어찌 차마 전하께서 선례(先例)를 남기시려 하옵니까?"
영조는 크게 노하여 명흠을 내쫓았다. 그리고 곧바로 선전관에게 칼을 내리면서 명령했다.
"저자의 뒤를 밟다가 그가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다른 집으로 들르거든 그와 그집 주인까지 목을 베어 오너라. 만일 집으로 곧장 가거든 따라 들어가 왕명으로 형을 집행하러 왔다고 말하라. 그가 원망하는 기색 없이 형을 받으려 하거든 살려주고, 조금이라도 변명을 하거든 목을 치도록 하라."
왕이 명흠의 행동을 알아 보라고한 것은 그가 어느 당파의 사주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명흠은 쫓겨나는 순간부터 자기가 무사하지 못할 것을 짐작하고 곧장 집으로 돌아가 왕명이 떨어지기만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선전관이 들이 닥치더니 왕을 비방한 죄로 참형을 받으라고 했다. 이미 각오하고 있던 명흠은 순순히 그 말에 응했다.
"마지막 할말이 없느냐?"
"전하의 명령인데 신하된 자가 어찌 거역할 수 있겠소. 어명을 따르고자 할 뿐이오. 어서 목을 치시오."
명흠이 거적을 깔고 꿇어앉았으나 목을 베지 않았다.
"어찌하여 목을 베지 않는 것이오?"
"주상께서 목을 내놓거든 베지 말라 하셨오."
명흠이 그 말을 듣자 엄숙하게 말했다.
"이것은 왕이 신하를 농락하는 것이오. 군왕이라도 신하를 농락해서는 안되는 일이오. 왕명(王命)은 지엄하여 오직 하나(只一)뿐으로 영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오. 어서 내 목을 쳐 왕명을 바로 세우시오."
그러자 선전관이 말했다. "나는 왕명을 지킬 뿐이오."
영조는 장헌세자가 죽자 슬픈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 사도세자(思悼世子)라는 시호를 내렸다.
효창원 7위선열기념사업회 이사 두평 임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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