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인숙의 옛그림 예찬]신한평(1726 또는 1735-1809?) ‘자모육아’

미술사 연구자

종이에 채색, 23.5×31㎝,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종이에 채색, 23.5×31㎝,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오월이라 어린이가 주인공인 그림을 올리고 싶어 신한평의 풍속화 '자모육아(慈母育兒)'를 택했다. 신한평은 영조, 정조, 순조시대에 걸쳐 40여 년을 도화서 화원으로 근무했고, 왕의 초상화를 그리는 어진(御眞) 제작에 세 차례 뽑힌 어용화사이다. 영조 49년, 정조 5년, 정조 15년이었다. 조선 숙종 때부터 어진을 그리게 되면 화사의 선발에서부터 제작, 봉안 등의 절차를 임시기구인 도감을 설치해 제도적으로 관리했다. 왕의 초상화를 지칭하는 용어가 어진으로 통일된 것도 숙종 때다. 어용(御容), 성용(聖容), 진용(眞容), 진영(眞影), 여영(御影), 왕영(王影), 왕상(王像) 등이 있었는데 어용은 조선말까지 어진과 함께 사용되었다.

어진을 그리는 일은 왕을 직접 보고 그리는 도사(圖寫), 승하한 뒤에 그리는 추사(追寫), 기존의 어진을 본떠 그리는 모사(模寫)의 세 유형이 있었다. 조선후기 어진도사에는 왕의 얼굴을 그리는 주관화사 1명, 몸 부분 곧 옷을 그리는 동참화사 1명, 설채(設彩)를 돕는 수종화사 4-6명 등 총 6-8명이 동원되었는데 많을 때는 13명이 되기도 했다. 신한평은 세 차례 모두 수종화사로 참여했다. 이 때 어용을 그린 주관화사는 각각 변상벽, 한종유, 이명기였고, 동참화사는 세 번 모두 김홍도였다. 강세황이 "무소불능(無所不能)의 신필(神筆)"이라고 한 김홍도는 한 번도 주관화사가 되지 못했다. 도화서의 존재 이유 중 하나인 초상화에 있어서만큼 김홍도의 시대에도 쟁쟁한 대가가 많았다.

금상(今上)을 지척에서 대면하고 관찰해 "용안을 모시는" 일은 단순한 그림 제작이 아니었다. 화원 최대의 영광이었고 일이 끝나면 포상으로 벼슬이 내려지는 특혜가 따랐다. 신한평이 영조 50년(1774년) 당시 신지도에 유배되어있던 이광사를 그린 초상화가 전하고 있어 그의 초상화 실력을 잘 보여준다. 어진도사의 공로를 치하하는 수로지은(酬勞之恩)으로 신한평이 신지도 만호(萬戶)에 제수되었을 때 그린 것으로 여겨진다. 이 때문인지 이광사의 아들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조선의 명화가로 정선, 강세황, 김홍도, 심사정 등과 나란히 신한평을 꼽았는데 '이광사 초상'을 보면 수긍이 간다.

지금 전하고 있는 신한평의 작품은 10점 미만이다. 그 중에 풍속화 '자모육아'가 있어 그의 아들이 혜원 신윤복이라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세 아이와 엄마를 현실감 나게 그린 '자모육아'는 실제 모델을 보고 사생했음이 분명하다. 신한평의 외동딸과 두 아들 윤복과 윤수, 그리고 그의 아내였을 것 같다. 그렇다면 엄마 뒤에 서서 있는 울고 있는 남자아이는 장남인 어린 신윤복이 된다. '일재(逸齋)'로 호를 크게 썼고 그 아래 백문방인 '산기일석가(山氣日夕佳)'를 찍었다. "산 기운은 해 저녁에 아름답고"는 도연명의 시 '음주'의 한 구절이다.

신한평은 미인도도 잘 그렸다. 정조 때 대 수장가인 김광국이 신한평에게 미인도를 주문한 일화가 『석농화원』에 나온다. 그림은 전하지 않고 신한평의 미인도에 대해 "풍만한 살결과 어여쁜 자태가 너무나 실감나서 오래 펼쳐볼 수가 없었다. 오래 보았다가는 이부자리를 망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라는 김광국의 솔직한 감상평만 전한다.

미술사 연구자

* 지난 회 이도영 '세검정' 화제 중 '잔춘일(殘春日)'은 '전춘일(餞春日)'의 오기임을 죄송한 마음으로 정정합니다. 지적해 주신 허(許)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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