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스티노신학교
유스티노 소신학교(예비과) 기숙사 생활은 고역이었다. 새벽 종소리에 일어나 기도와 묵상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엄격한 규율의 수도원과 다르지 않았다. 여름도 견디기 어려웠지만 한겨울 매서운 추위는 어린 학생들에게 뜨뜻한 온돌방을 그립게 했다. 싸늘한 침대에서 일어나면 또 살얼음 낀 찬물로 세수를 했다. 잡담은 금지였고 침묵을 가르쳤다.

추기경도 집에 가고 싶었다. 옷 속에서 동전 하나가 나왔다. 돈을 가지고 있으면 쫓겨난다고 들었다. 서랍 속 잘 띄는 곳에 동전을 두었다. 들킬 것은 뻔했고 집으로 갈 수 있겠다 싶었다. 신부님이 고해성사실로 오라고 했다. 쫓겨난다는 기쁨에 달려갔더니 청소하라는 말뿐이었다.
성유스티노신학교는 대구교구 초대교구장인 드망즈(안세화) 주교의 열정과 기도로 세워졌다. '우리 조선 사람들은 아들을 바칩니다. 신학교를 세워주십시오'라며 세계 곳곳에 호소했다. 익명의 기부자가 성 유스티노의 이름으로 설립해 달라며 큰돈을 보내왔다.

학교는 1914년 개교했다. 설계는 명동성당을 완성시킨 신부가 맡았고 중국인 기술자들이 벽돌을 구웠다. 그 바람에 대구에도 중국인 거리가 생겼다. 가운데 성당을 두고 양쪽 날개 건물에 대신학교와 소신학교가 들어섰다. 1950년대까지 경상북도에서 단일 규모로는 가장 큰 건물이었다. 이곳에서 67명의 사제가 배출됐다. 주교도 7명이 나왔다. 전주· 광주·부산·마산·제주교구가 여기서 뿌리를 찾는다.
◆100주년 기념관
유스티노 신학교는 일제 말 강제 폐교됐다. 그 맥을 이어 1982년 재개교한 선목신학대학이 1991년 이전해오기까지 경찰학교, 미군부대, 육군병원 등으로 쓰였다. 대건중·고등학교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선목신학대학은 의학과가 생기며 대구가톨릭대학으로 개명했다가 효성여대와 통합하며 대구효성가톨릭대학교로, 다시 2000년에는 대구가톨릭대학교로 교명을 바꿨다. 그때 신학대학은 대구가톨릭대학교 대구관구 대신학원이란 이름을 얻었다.
헐고 새로 지어진 날개 건물에는 신학교 학부동과 본부동이 자리했다. 대구관구 소속 성당의 사제들이 여기서 배출된다. 옛 모습 그대로인 중앙 건물은 유스티노 신학교 100주년 기념관이다. 겉모습만으로도 근대 건축문화의 중요 자료인 기념관은 경당과 성 유스티노홀(건축관), 드망즈홀(설립자관), 앗숨홀(문서관), 옴니아홀(100주년관)로 나눠져있다.

각각의 홀에는 드망즈 주교를 비롯한 역대 교수 신부들과 학생들의 사진에서부터 건축물의 100년 변화상까지 각종 자료가 전시돼 있다. 폐교 당시 신암성당으로 옮겨졌던 종탑의 종도 돌아왔다. 라틴어 사전과 교재, 오르간도 있다. 스테인드글라스가 새로 마련된 경당도 백년 전 그대로다. 유스티노 100주년 기념관은 안팎으로 근대 백년의 대구 역사를 간직한 소중한 문화재다.
◆마음을 다잡아 준 스승들
예비과를 마친 추기경은 연합소신학교로 운영되던 서울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들어갔다. 여전히 신부가 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 않았다. 꾀병으로 퇴학당할 궁리도 했다. 꼭 신부가 돼야 하나, 나 같은 사람도 신부가 될 수 있나 하는 회의와 갈등이 이어졌다. 같은 학교에 다니던 동한 형은 어린 동생이 신부가 되려는지 독립운동가를 꿈꾸는지 걱정스러웠다.
어느날 공베르 교사 신부가 "양을 훔치려는 도둑 같은 심보를 갖고 온 학생은 지금이라도 보따리 싸는 게 낫다"고 했다. 자신에게 하는 말로 들렸다. 신학교를 나가겠다고 했더니 공베르 신부가 말했다. "신부는 되고 싶다고 되고 되기 싫다고 안 되는 게 아니다."
어느 일간지가 '김수환 추기경 하면 떠오르는 게 무엇인가'란 설문조사를 했다. 제일 많은 대답이 '인자한 웃음'이었다. 공베르 신부는 추기경에게 미소를 가르쳤다. 영적 성숙을 위해선 먼저 너그러워야 한다고 했다. 추기경도 생전 주변 사람들에게 웃는 연습을 하라고 권했다.
졸업반 수신(윤리)과목 시험문제는 '황국신민으로서의 소감'이었다.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썼다. 이튿날 교장실에서 호출이 왔다. 학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위험한 행동이라며 꾸짖는 교장 선생에게 말대꾸를 하다 뺨까지 맞았다. 졸업을 앞두고 대구교구 무세 주교가 학교에 들렀다. 주교와 교장은 '위험하지만 될성부른' 제자에게 일본 유학을 추천했다. 그때 교장이 장면 전 총리다. 훗날 장 총리의 아들 장익 주교에게 추기경이 당시 심정을 이야기했다. "장 선생님이라면 속을 털어 놓아도 될 거라고 믿었다."
일본 상지대 유학시절 만난 게페르트 신부는 사제의 길을 결심하는데 어머니 못지않게 영향을 준 스승이다. 괴로워하는 식민지 학생에게 하느님이 버리지 않을 것이라며 영적 위로를 아끼지 않았다. 신부가 되면 더 고독하다며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으라고도 했다. 한국에서 살고 싶어 한 게페르트 신부는 소망대로 1960년 서강대를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어머니의 기도-성모당
일제의 학병 강요를 피할 방법이 없었다. 유학시절을 같이 보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가 추기경의 형편을 설명했다. "소속 교구와 가족이 시달릴 것을 뻔히 알면서 자기 한 몸 편하자고 도망갈 수 있었겠나." 근무지로 향하던 바다에서 죽을 고비를 만났다. 갑자기 어머니 품에서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어머니 눈앞에서는 죽지 않겠다던 평소 생각과 달랐다. 생각과 본심에는 차이가 있다는 걸 알았다. '가슴 깊은 속 본심은 무엇일까'는 이후 추기경의 화두가 됐다.
해방 다음해 귀국선을 탔다. 추기경은 '다시 만난 어머니가 그렇게 우는 모습은 처음 봤다'고 회상했다. 어머니가 성모당으로 데려갔다. 기도하던 사람들이 말했다. "어머니 기도 덕에 살아 왔네." 어머니는 사지로 끌려간 막내아들을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성모 마리아 앞에 두 손 모아 기도했다. 추기경의 가슴에 '어머니의 사랑이 이렇게 큰데 하느님의 사랑은 얼마나 클까'라는 감동이 밀려왔다.
성모당은 드망즈 주교의 기원과 약속의 결실이다. 서상돈 선생이 기증한 대지에 사제들의 집과 신학교를 세워주시고 계산성당을 증축할 방도를 마련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주교관 내 가장 아름다운 자리에 루르드의 성모동굴을 세워 성모 마리아를 모시겠다고 약속했다.
넓은 풀밭을 앞에 두고 북향으로 세워진 성모당은 성지답게 장엄하다. 주교의 약속대로 교구청 내 가장 높고 아름다운 자리에 섰다. 적색 벽돌 구조물의 내부는 암굴처럼 꾸며 성모 마리아상을 봉안했다. 전면 위에 새겨진 라틴어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바친 기도에 힘입어'라는 의미다. 왼편 '1911'은 대구교구 설립연도이며 맞은편 '1918'은 주교의 소원이 모두 이뤄진 해다. 루르드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천주교 대구대교구 주보성인이다.
성모당은 사시사철 기도하는 사람들로 붐빈다. 언제 어디서건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숙연하고 아름답다. 찬양하고 감사하거나 고백하며 축복을 빌거나 모두 영성으로서의 인간을 느끼게 한다. 정호승 시인의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이란 시가 떠오른다.
〈서영관 스토리텔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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